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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재구성] `대단한 성취` 20승, 박철순에서 양현종까지

기사입력 [2017-12-0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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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양현종은 바쁘다. 늘 미소를 머금고 있다. 행복하다. 2017년을 최고의 해로 만든 사나이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양현종은 KIA 타이거즈의 에이스다. 해외 진출을 유보하고 국내에 남아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총 31게임에 나가 193.1이닝을 던지는 동안 20승6패와 평균자책점 3.44를 기록했다. 헥터와 함께 마운드의 쌍두마차로서 페넌트레이스 1위를 완성했다.

끝이 아니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양현종은 펄펄 날았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온 몸을 받쳤다. 선발로 나가 승리한 것은 물론 우승을 확정짓는 마무리까지 자청해 세이브까지 기록하면서 MVP로 등극했다.

양현종은 12월1일 광주여대에서 열린 KIA V11 팬 페스트에서 팬과의 약속을 이행했다. 걸그룹 분장을 하고 선미의 히트곡 ‘가시나’에 맞춰 춤을 췄다.

2017년 정규 시즌 MVP, 한국시리즈 MVP에 이어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회가 선정한 최고의 선수상을 받았고,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에선 선수가 뽑은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1999년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 이후 18년 만에 20승 투수로 거듭난 결과였다. 왼손 투수로는 1995년 LG 트윈스 이상훈에 이어 21년 만에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20승은 투수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는 ‘불멸의 기록’이다.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20승을 달성하면 영원히 팬들의 입에 오르내릴 역사가 된다.

 

원년 유일한 20승 투수, ‘불사조’ 박철순 스타 탄생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했다. MBC 청룡, OB 베어스, 삼미 슈퍼스타즈,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등 6개 팀으로 출발했다. 이름만 프로였지 모든 것이 엉성했다. 구장 환경은 열악했고, 선수들의 기량도 워낙 편차가 심했다. 구단의 운영 능력도 초보 단계였다. 그래도 그라운드의 열기는 뜨거웠다. 스타 탄생이 시작됐다.

미국 마이너리그를 경험한 박철순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OB 베어스의 에이스로서 24승4패와 평균자책점 1.84를 기록하면서 원년 우승까지 일궈냈다. 고질적인 허리 통증을 참고 마운드에 올라 ‘불사조’가 됐다. 원년 우승을 이끈 김영덕 감독이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정도였다. 박철순은 프로 원년 유일한 20승 투수로 등극하면서 35년이 흐른 지금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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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 박철순 

 

30승은 불멸의 대기록, ‘너구리’ 장명부는 ‘신화 제조기’

 

장명부는 재일동포다.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카프의 황금기에 활약하면서 재팬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승부사 기질이 남달랐고, 배짱도 좋았다. 고국 무대에서 숱한 불멸의 기록을 만들었다.

프로 출범 초기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약체였다. 투타 모두 형편없었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았다. 경기 내용도 최악이었다.

그러나 장명부는 달랐다.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올라갔다. 마치 대학생이 중학생을 다루듯 상대 타자를 요리했다. 다양한 변화구로 타자의 눈을 흔들어놓고, 정교한 제구력으로 범타를 유도했다.

1983년 삼미 입단 첫 해부터 무려 60게임에 등판했다. 팀 당 총 100경기를 치른 때였다. 선발로 나간 44게임 중 36게임을 완투했다. 무려 총 427.1이닝 동안 1712명의 타자를 상대해 30승16패와 평균자책점 2.34를 남겼다. 장명부 혼자 마운드를 지킨 셈이었다.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 출전경기, 시즌 최다 선발 경기, 시즌 최다 완투, 시즌 최다 투구이닝 등은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기록이다. 현실에선 꿈도 꿀 수 없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숫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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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부

 

 ‘영원한 라이벌’ 최동원과 김시진, 전설의 시작

 

최동원과 김시진은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경남고 최동원, 대구상고 김시진, 군산상고 김용남은 ‘초고교급 삼총사’라는 수식어와 함께 고교 야구의 황금기를 열었다. 최동원은 연세대, 김시진과 김용남은 한양대에 진학하면서 일찌감치 국가대표로서 함께 했다.

고교, 대학, 프로까지 이어가면서 ‘쌍웅’으로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스타는 최동원과 김시진이었다. 이들도 ‘20승 투수’라는 자랑스런 훈장을 달고 있다.

최동원은 야구 도시 부산의 에이스였다. 1984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51경기에 출전해 27승13패 6세이브와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했다. 마무리로 등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총 284.2이닝을 던져 ‘강철 어깨’란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5게임에 나가 4승1패를 기록하면서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영원히 깨질 수 없는, 누구도 다시는 쓸 수 없는 역사를 남기고 이젠 고인이 됐다.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최동원은 1985년에도 20승9패와 평균자책점 1.92를 기록했다. 김시진과 함께 2차례 ‘20승 ’ 이상을 달성한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김시진은 ‘비운의 에이스’였다. 정규 시즌에선 최상의 피칭으로 1985년 25승5패와 평균자책점 2.00, 1987년 23승6패와 평균자책점 3.12를 기록하면서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삼성의 희망이자 최종 목표였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내지 못했다.

결국 김시진은 1988년 시즌을 끝낸 뒤 최동원과 트레이드되는 얄궂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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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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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무등산의 전설’ 선동열, 유일하게 3차례 ‘20승’ 달성

 

선동열은 ‘무등산 폭격기’다. ‘국보 투수’라 했다. 해태 전성기를 이끈 ‘무적’이었다.

선동열이 등판하면 상대 팀은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어차피 넘지 못할 벽이라면 이렇게 지나 저렇게 패하나 똑같은 1패이니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했다. 선동열은 평균자책점에서 나타나 듯 완벽한 투수였다. 1점을 뽑아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선동열은 최동원과 김시진에 잇는 에이스다. 1986년 처음으로 24승6패 6세이브와 평균자책점 0.99를 기록하면서 최고 투수로 등극했다. 22차례 선발로 나가 19차례나 완투했고, 그 중 8차례 완봉승을 거뒀다. 그 해 방어율은 역대 3위다. 자신이 1993년 기록한 0.78, 1987년 남긴 0.89까지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0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린 투수로 남았다.

선동열은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3차례 20승 이상을 올린 독보적인 투수다. 박철순, 최동원, 김시진 등 선배들이 꿈꾸지 못한 불멸의 대기록을 완성했다. 선동열은 1989년 21승3패 8세이브와 평균자책점 1.17, 1990년 22승6패 4세이브와 평균자책점 1.13으로 왜 자신이 ‘국보 투수’인지 스스로 입증했다.

‘무등산 폭격기’는 전천후였다.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 언제든 출격했다.

전설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늘 준비된 투수였다. 밑거름은 언제나 러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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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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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투수 첫 20승, ‘야생마’ 이상훈이 만든 금자탑

  

이상훈은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다. 풍운아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날리며 마운드에 올라 결정적인 순간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면 왼손으로 강렬한 어퍼컷을 날리는 세리머니로 팬들의 환호에 답하곤 했다.

이상훈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뒤 프로 2년째인 1994년 에이스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18승을 올려 해태 조계현과 함께 다승 공동 1위에 올랐고, LG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95년 30게임에 나가 총 228.1이닝을 던지는 동안 20승5패와 평균자책점 2.01을 기록했다. 왼손 투수로선 사상 첫 20승 등극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예고편을 썼다.

이상훈은 1996년부터 선발에서 마무리로 보직을 바꿨고, 1997년에는 37세이브를 따내면서 구원왕도 차지했다.

이상훈은 다승왕과 구원왕을 경험했다. LG의 우승도 함께 했다. 마음은 더 큰 곳으로 향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고, 다시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를 거쳐 국내로 유턴했다.

20승 투수의 자존심을 걸고 험난한 길을 스스로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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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마 이상훈

 

김성근 감독이 억지로 만든 김현욱의 ‘20승 사건(?)’

  

김성근 감독은 ‘투수 조련사’로 통했다. 쌍방울의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수함 투수’ 김현욱을 중간과 마무리로 등판시켜 끝내 20승 투수를 만들었다. ‘김현욱을 혹사시킨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다승 1위, 평균자책점 1위, 승률 1위의 3관왕으로 만들었다. ‘20승의 가치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렸다’는 쓴 소리에도 항변하기 어려웠다.

김현욱은 그해 단 1경기도 선발로 나가지 않았다. 총 70경기를 중간이나 마무리로 나갔다. 20승이 모두 구원승이다. 패배는 두 차례. 승률 9할9리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이닝을 던지니 평균자책점 관리도 비교적 쉬웠다. 평균자책점 1.88.

불펜 투수가 20승을 올리는 경우는 메이저리그나 일본, 대만 어디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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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욱

  

‘사라진 구단’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 정민태

  

정민태는 현대 유니콘스의 황금기를 이끈 에이스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지만 병역 비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느라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6년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한 뒤 재활에 성공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올렸다.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주가를 올렸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9년 리그 운영에 변화를 시도한다. 미국과 일본처럼 양대 리그제를 도입했다. 드림리그와 매직리그로 나눴다. 현대는 드림리그. 정민태는 현대의 에이스로 양대 리그 첫 해에 20승7패와 평균자책점 2.54를 기록하면서 다승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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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

 

20승 투수의 실종과 외국인 전성 시대

  

정민태가 20승 투수로 등극한 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은 투수들의 암흑기였다. 20승 투수가 사라졌다. 심지어 2001년에는 롯데 손민한과 LG 신윤호가 15승을 올리고도 다승 공동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2009년에는 KIA 로페즈, 삼성 윤성환, 롯데 조정훈이 14승으로 공동 다승왕이 됐다. 또 2013년에도 삼성 배영수와 SK 세든이 14승으로 다승 공동 위가 됐다.

토종 투수들의 위력이 떨어지는 틈새를 외국인 선수들이 파고 들었다. 2007년 두산 리오스가 7년 동안 사라졌던 20승 이상을 달성했다. 22승5패와 평균자책점 2.07.

그 후 2013년까지 또 6년의 공백기가 생겼다. 2014년 넥센 밴헤켄이 20승6패로 다승왕을 차지하며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2016년 두산 니퍼트도 22승3패와 평균자책점 2.95, 2017년 KIA 헥터가 20승5패와 평균자책점 3.48로 에이스 역할을 다하면서 각각 팀의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20승은 ‘특급 투수의 표상’이다. 토종 에이스 양현종의 20승이 반가운 이유다. (이창호 전문기자/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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