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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세의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꿈`

기사입력 [2017-09-1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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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화장품 모델로 데뷔한 황신혜는 데뷔 초부터 뚜렷한 이목구비의 얼굴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인하전문대 항공운항과에 다니며 스튜어디스를 꿈꾸던 학생이었으나 데뷔하자마자 금세 방송관계자들의 성화(?)에 도저히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지요. 1983MBC TV 공채탤런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는데, 방송가 안팎에서는 앞다퉈 그녀의 미모를 분석하느라 분주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자연미인의 시대를 지나 막 성형미인의 시대로 접어들던 때여서 성형외과 전문의들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른바 미인의 첫째 조건인 황금비율을 갖춘 얼굴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마에서 눈썹, 눈썹에서 코끝, 그리고 코끝에서 턱까지의 비율이 1;1:1인 경우를 가장 이상적인 얼굴 비율로 보는데, 황신혜가 바로 그 조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황신혜는 얼굴 부위별로 수평 밸런스까지 갖추고 있었던 터라, 훗날 컴퓨터 미인이라는 닉네임이 자연스럽게 붙게 됐지요.

이처럼 완변한 미모를 가진 신인의 등장으로 방송가는 늘 떠들썩했고, 영화계 또한 이러한 조건의 여배우를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처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이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 감독)이었습니다. 맑고 순수한 한 청년의 사랑고백서와도 같은 이 영화에서 황신혜는 그 청년(안성기)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지고 여주인공은 세상을 떠나는 해피엔딩이자 새드엔딩인 이 영화에서 황신혜는 눈 감기 전의 감동적인 마지막 대사로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사랑을 하려거든 영혼으로 해야죠. 생명은 꺼지면 그만이지만 영혼은 영원하니까요

 

황신혜는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전해준 이 영화에서의 호연으로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배창호 감독 사단(조감독 이명세, 주연 안성기)개그맨’(1988)’(1990)까지 연거푸 세 번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세 편 모두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 영화였습니다만 특히 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독특한 영화였습니다. ‘한국의 스필버그로 일컬어지며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 만드는 영화마다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던 배창호 감독이 생동감으로 가득했던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롱테이크(하나의 쇼트를 길게 촬영하는 기법으로 대개 한 쇼트가 10초 내외인데 반해 1~2분 이상 진행됨) 촬영 등으로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기 시작해 황진이‘(1987)에 이어 더욱 깊어진 탐미적 영상을 선보인 영화였습니다. 또 스크린에 비쳐지는 등장인물들과 그 상황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듯한 방식의 연출은 시쳇말로 매우 고급졌습니다‘.

 

조신(안성기)는 승려입니다. 어느날 두견새가 피를 토할 것 같은 미모의 양반집 규수 달례(황신혜)가 절을 방문합니다. 달례를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번뇌에 빠져든 조신은 끝내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목욕중인 달례를 범합니다. 이를 계기로 조신은 화랑인 모례(정보석)과 정혼한 사이인 달례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나 가정을 꾸립니다. 아이 둘까지 낳고 염색집을 운영하지만 조신은 달례의 마음까지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염색집의 점원과 사랑을 나누는 달례, 그리고 복수의 칼을 겨누고 추적해오는 모례 등으로 인해 조신은 번민에 휩싸입니다. 모례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잃고 달례는 매춘부가 됩니다. 조신 역시 아편중독 폐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오랜 세월 후 달례를 찾아 헤매던 조신은 문둥이촌에서 달례의 죽음 소식을 듣습니다. 홀로 바닷가에서 연명하던 조신에게 모례가 찾아와 복수의 칼을 겨누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이 되어버린 그를 용서합니다. 백발이 되어 다시 절을 찾아 돌아온 조신은 불당 앞에 쓰러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한바탕의 꿈이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에서 보듯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198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일련의 흥행영화들에 열광하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배창호표 영화팬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배창호표 영화팬들의 기대는 여전히 고래사냥이나 깊고 푸른 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풀어내 즐겁게 영화를 소비하는 것이었으나 배창호 감독은 또다시 황진이에 이어 '꿈'에서도  롱테이크로 절제와 생략을 과감하게 시도하며 영화의 여백까지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채우기를 바라는 형국이었으니까요.

이같은 이유로 은 불과 73분밖에 되지 않는 러닝타임(상영시간)이었지만 적지 않은 관객에게 길고 지루한 영화로 느끼게 했습니다. 어떤 관객은 영화를 보고나와서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배창호 감독의 교만이라고 힐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남의 돈으로 영화찍는 연습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관객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언론의 반응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에둘러 표현하자면 영화의 만듦새는 나쁘지 않으나 대중과의 괴리가 크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까칠한 비평으로 영화관계자들 사이에 악명(?) 높은비평가들이 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 설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어서 새로울 것 없지만 배창호 감독의 에서는 이 이야기가 격정적인 유혹의 드라마로 펼쳐지면서 조신(안성기) 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욕망과 번뇌에 빠지게 만든다는 평(연출의 흡인력)이었습니다. 음영을 짙게 드리운 섬세한 조명과 촬영은 영화 속의 여주인공 달례(황신혜)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으로 느끼게 한다고도 평했습니다. 한 커트, 한 커트 얼마나 공을 들여 찍었는지 당시 제작부와 연출부 스태프들도 그 시절에 그처럼 하루에 몇 커트밖에 안찍는, 그런 영화현장은 거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삼국유사의 조신 설화를 춘원 이광수가 1947년 소설로 써냈고, 이를 원전으로 고 신상옥 감독이 1955(황남, 최은희 주연)1967(신영균, 김혜정 주연)에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배창호 감독이 이것을 다시 리메이크한 셈인데, 애틋한 남녀간의 사랑에 포커스를 맟췄던 신상옥 감독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으로 탄생했습니다. 남녀의 사랑 이전에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을 허무한 꿈에 비유하면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해탈의 어려움을 일깨운 것이죠. 물론 유려한 촬영과 조명, 편집 등으로 흐드러진 봄꽃의 향연과 짙푸른 녹음, 낙엽이 지고 폭설에 쌓인 설경 등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점도 빼놓을 수가 없구요.

하지만 배창호표 영화팬들의 실망과 그 입소문의 영향으로 극장에서의 상영기간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만 대중과 소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그래선가요, 황신혜는 배창호 감독 사단과의 영화적 인연을 이 작품으로 끝내고 맙니다.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과 더불어 저주받은 걸작으로 꼽은 어느 평론가의 안타까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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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두견새가 피를 토할 것 같은 미모를 지닌 여주인공 달례(황신혜)와 첫 눈에 달례에게 마음을 빼앗긴 승려 조신(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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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혜와 안성기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개그맨'에 이어 '꿈'에서 세 번째로 연기호흡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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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는 '만다라'(1980년, 임권택 감독)에 이어 또다시 승려(조신) 역할을 맡아 삭발 연기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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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광고모델로 데뷔할 때부터 완벽한 미모를 자랑하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컴퓨터 미인' 황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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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 들어서는 달례(황신혜)를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번뇌에 휩싸이게 되는 조신(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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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례(황신혜)를 향해 끓어로는 욕정을 억누르기 위해 불당을 찾은 조신(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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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촬영현장에서는 특히 자연광선 등 조명에 세심한 준비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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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달의 촬영 기간 종안 삭발한 머리카락이 자라나서 다시 손질하는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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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에서 큰 스님 역을 맡은 배우(윤문식)에게 촬영할 장면에 대해 설명하는 배창호 감독(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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