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스포츠산책

[스포츠산책] 조선체육회 혼(魂)을 잊지 말자!

기사입력 [2019-02-04 10:01]

우리 체육계가 혼란에 빠져 있다. 각계 전문가들은 체육계의 쇄신을 한 목소리로 내고 있는 가운데 대한체육회의 분리 독립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거론하고 있다. 불과 3년 전 2016년에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하여 새로운 각오로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 쇄신책이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설립 당시의 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thumb_20110706141242312_12274.jpg

1920년대 체육 발전을 위한 회의 모습

 

19108월 한·일 합방에 의한 일본의 무단통치정책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빼앗긴 조선은 스포츠 활동 역시 통제와 탄압을 당했다. 이후 191931일 독립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무단통치정책 대신 문화통치정책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면서 조선의 스포츠 활동에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 기자였던 평파 변봉현 선생은 체육단체의 필요성을 논하는 논설인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을 연재하면서 조선스포츠계를 위한 단체 설립을 언급한다. 이에 따라 일본유학생과 국내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체육문제해결과 조선운동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고려구락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여 활동범위를 보다 확대한 조선체육회로의 개칭을 하게 된다. 이로써 1920616일 고원훈, 이동식, 장두현, 변봉현 등 47인이 참석한 자리에서 창립위원 10인과 창립취지서 그리고 규칙서를 제정하여 마침내 1920713일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창립 총회가 열렸다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jpg

조선체육회 창립취지서 원본

 

조선체육회의 설립목적은 체육운동을 범국민화하여 학교체육 및 사회체육의 진흥으로 국민의 체력향상과 건전하고 명랑한 기풍을 진작시킴과 아울러, 아마추어경기단체를 통할지도하고 우수한 경기자를 양성하여 국위선양을 도모함으로써 민족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스포츠를 통한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은 창립취지서의 일부 내용이다.

 

보라 하늘의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 (중략)우리 조선사회에 개개의 운동단체가 무함이 아니라. 그러나 이를 후원하며 장려하여서 조선인민의 생명을 원숙 창달하는 사회적통일적 기관의 흠여함은 실로 오인의 유감이고 또한 민족의 수치로다. 오인은 자에 감한 바 유하여 조선체육회를 발기하노니, 조선사회의 동지제군자는 그래하여 찬할진저.’(창립취지서 )

 

thumb_20110706140056343_152147.jpg

1920년대 야구대표팀 모습

 

준비위원회가 내세운 발기인의 첫 번째 조건은 '친일 색채가 없는 인물'이었다. 엄격한 선정 과정을 거쳐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93명의 직업은 기자, 교사, 의사, 실업인, 은행가, 변호사, 학생, 야구인, 축구인 등으로 다양하다. 그만큼 조선 체육을 집대성할 단체에 대한 각계각층 민족 구성원의 염원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체육인들은 일본인들의 조직인 19192월에 창립한 조선체육협회와 차별화된 조선체육회를 창립해 체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창립 이념은 건민저항이다. 

 

thumb_20110706140056321_112187.jpg

1920년대 정구 선수들 모습

 

이후 초대회장이었던 장두현 선생은 조선체육회로는 처음으로 그 해 114일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는 전국체전의 효시가 되었다. 창립 2년째인 1921년에는 정구대회, 육상대회, 빙상대회 등 다양한 체련의 장을 마련, 민족 투혼을 살렸다. 활발한 체육 장려 분위기에서 육성된 손기정은 비록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알렸다. 창립 후 1년간은 사무실도 없이 술집 등에서 모임을 가졌던 조선체육회는 1921년 고원훈 보성전문학교장을 2대 회장으로 뽑고 난 뒤 보성전문 사무실에 체육회 책상을 마련할 수 있었다.

 

thumb_20110706132057573_423.jpg

야구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 사람들이 관심 있게 구경하고 있는 모습

 

1937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한 조선체육회는 전국에 약 250개에 이르는 각종 체육단체를 설립하여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으나, ·일 전쟁의 여파로 조선총독부는 조선체육회를 전면 통제하였다. 이후 스포츠를 통해 민족 자긍심을 키우고, 항일투쟁을 펼치던 조선체육회는 유억겸 10대 회장이 재임하던 193874일 조선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체육협회에 강제 통합돼 해산되고 만다. 조선체육회는 1945년 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중심으로 부활한 뒤 1948년 이름을 대한체육회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47년에는 조선체육회 안에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정식 가입하게 된다. 19543월에는 민법에 따라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로 정식 출범하게 되었고, 19831월부터 국민체육진흥법에 따라 특수법인이 되었다. 이후 2009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가 대한체육회에 통합되었고, 2016년에는 국민생활체육회와 합쳐져 통합 대한체육회(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로 거듭나게 되었다

 

1920년 1회 전조선야구대회 우승깃발을 들고 있는 배제.jpg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 모습

 

이러한 역사적 사명과 민족정신으로 어렵게 일군 대한민국 체육기관의 대표격인 조선체육회의 정신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유산이다. 식민지 통치와 전쟁을 겪었지만, 짧은 시간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큰 힘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체육회는 단순히 체육정책을 이끌어 나가는 하나의 기관이 아닌 만큼 그 정신을 계승하여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체육단체로 그 명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전제로 현인들의 지혜를 모아 민족정신 계승과 향후 백년지계를 오롯이 달성할 수 있는 쇄신을 기대해 본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대한체육회가 10년 전에도 똑같은 고충을 겪었는데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100년은 이와 같은 고충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바꿔 매어 개혁을 하다의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진국 전문기자/navyjk@daum.net사진_대한체육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