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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기사입력 [2018-01-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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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 국제영화제는 영화에 종사는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는 꿈의 무대와도 같습니다.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레드카펫을 밟으며 공식 시사회장인 뤼미에르 극장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흥분에 휩싸입니다. 하물며 수상의 영광까지 안게 됐을 때의 감격이란 그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칸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은 영화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2000춘향뎐’(임권택 감독)을 시작으로 칸의 무대를 본격적으로 밟기 시작한 한국영화는 취화선(2002, 임권택 감독)의 감독상, ’올드보이‘(2004, 박찬욱 감독)의 심사위원 대상, ’밀양‘(2007, 이창동 감독)의 여우주연상(전도연), ’박쥐‘(2009, 박찬욱 감독)의 심사위원상, ’‘(2010, 이창동 감독)의 각본상 등을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했지요. 다만 아직은 칸 국제영화제의 최우수작품상으로 불리는 황금종려상은 수상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기는 영화예술이 올림픽도 아닌데, 메달의 색깔을 논하는 게 우습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약간의 아쉬움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팜도르(PALME D'OR)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영화라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머잖아 한국영화도 칸 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1994년 칸 국제영화제에서는 미국영화계의 앙팡테리블로 불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1992년 홍콩느와르 영화에서의 영감을 바탕으로 저수지의 개들이란 기발하면서도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 전세계 영화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지 불과 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전세계 영화계는 새로운 천재의 등장에 환호했지요. ‘펄프 픽션은 당연히 전세계로 팔려나가 상영되었습니다. 불과 7백만 달러(8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로 무려 25천만 달러(3천억원)의 대박흥행을 터뜨렸습니다.

 

펄프 픽션은 한국에서도 수입상영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내러티브(이야기)의 전개가 뒤죽박죽인 점이 독특했습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인과 관계에 따라 구성된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처럼 나열해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영화에 보다 더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럽게 관객의 집중을 이끌어낸 건지도 모르지요.

 

당시 한국의 관객들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감독에 대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떤 감독이길래 우마 써먼, 존 트라볼타, 새무얼 잭슨, 브루스 윌리스, 스티브 부세미 등 명배우들이 크고 작은 배역으로 출연하게 됐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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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삼류 소설가 효섭(왼쪽, 김의성)은 유부녀 보경(이응경)과의 섹스에만 탐닉한다.

 

그리고 2년 후, 한국에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홍상수 감독)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홍상수라는 신인감독의 데뷔작이었는데, 개봉 전 시사회를 통해 영화에 대해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운 한국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펄프 픽션과 유사한 영화구조와 함께 신파조의 과잉된 감정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기존의 장르적 관습과는 많이 다른 데다가 틀에 박힌 이야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시간의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들 각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보였지요. 그리고 펄프 픽션을 통해 학습(?)했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해서 각 등장인물들의 사연들을 스스로 조합해 냈습니다. 그렇게 영화의 내용을 이해했지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원래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인데요, 소설은은 영화처럼 뒤죽박죽의 옴니버스 구조를 띠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신인감독의 데뷔작이었던 만큼 시나리오 작업 초기에는 영화제작사(동아수출공사)에서도 적잖은 수정 요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리고 홍 감독도 그러한 제작사의 요구에 맞춰 여러번 각색작업을 했지요. 하지만 결국은 처음부터 다시 시나리오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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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남편 동우(박진성)를 두고 효섭(김의성)과의 일탈을 꿈꾸는 보경 역으로 열연한 이응경.

 

여기에는 홍 감독의 모친인 전옥숙 여사와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의 든든한 신뢰와 후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당시의 한국영화 제작 실정에 비춰볼 때, 데뷔감독이 자신의 뜻대로 시나리오를 탈고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홍 감독의 모친 전옥숙 여사는 1960년대부터 한국 문화예술계의 대모로 불릴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그녀는 1960년에 영화전문잡지인 주간영화를 발행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1963년에는 한국 최초의 스튜디오인 은세계 영화제작소를 설립했고, ‘연합영화사의 대표로 여러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본어에 능통했던 터라 한국의 문학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고, 1980년대엔 한국 최초의 드라마외주제작사 시네텔 서울을 설립해서 MBC TV베스트셀러 극장등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왕 조용필이 불렀던 많은 노래들의 작사가로, 또 김지하 윤흥길 등 70년대 당시 민주화 인사들의 후원자이자 조력자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제작사로 동아수출공사가 나선 것도 바로 홍 감독의 모친과 이우석회장의 돈독한 우정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동아수출공사 입장에서는 생색내고 대박까지 얻은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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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보경(이응경)을 의심하면서 동우(박진성)는 강제로 아내와의 섹스를 시도한다. 

 

변한 소설집 하나 내지 못한 소설가 효섭(김의성). 출판사에 보낸 자신의 원고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날 저녁 술자리에서 평론가와 대판 싸우고 철장신세를 집니다. 삼류 소설가로 취급받는 것에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면서도 유부녀인 보경(이응경)과의 섹스에는 열정적으로 몰두합니다.

결벽증이 심한 보경의 남편 동우(박진성)는 전주로 출장가면서도 아내 보경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한편 적당한 허영심과 허상을 갖고 소설가 아내를 꿈꾸는 극장매표원 민재(조은숙)는 효섭의 소설 원고 교정을 봐주는 것에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효섭은 민재에게 보경과의 불륜을 위해 필요한 여관비를 빌려갈 뿐입니다. 효섭에게 당신의 여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나는 뭐냐?”고 항변하지만 효섭은 민재를 외면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극장 직원 민수(손민석)는 민재를 위로하고, 민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에게 몸을 맡깁니다.

 

결국 효섭과 보경은 함께 떠나기로 합니다만 약속시간에 효섭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효섭의 집에 가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쓸쓸히 돌아서는 보경의 등 뒤로 관객은 방 안에 죽어있는 효섭과 민재,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살해한 민수가 문을 나서는 걸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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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이응경 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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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촬영현장.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이처럼 계속 어긋납니다. 돼지꼬리 일러스트 디자인을 배경으로 단편소설 같은 영화 - 우물에 빠진 날이라고 써넣은 영화포스터에, “어느날 돼지 한 마리가 우물에 빠졌다. 잠시후 요동은 그치고 잔잔해진 물 위로 나의 얼굴이 비친다고 씌어진 카피에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읽혀집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가 송강호의 첫 영화출연작이라는 점입니다.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중, 김의성의 소개로 극중 효섭의 친구 역으로 잠깐 출연하게 됐지요. 말하자면 초록물고기보다 먼저 출연했던 영화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었습니다. 간혹 송강호의 필모그라피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영화데뷔작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초록물고기’(1997)가 혼용되고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당시 영화비평가들은 이구동성으로 1996년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수확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등장을 꼽았습니다. 실제로 홍상수 감독은 이후 자신의 영화세계를 자유롭게 구축해나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서두에서도 칸 국제영화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만 홍 감독은 칸 국제영화제의 경쟁과 비경쟁 부문을 합쳐서 여덟 번이나 초청받아 칸 최다 진출 감독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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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홍상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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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김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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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홍상수 감독, 김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