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8월의 크리스마스`

기사입력 [2018-03-1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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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멜로영화는 늘 대중의 관심을 끕니다. 동양과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에 으뜸이 사랑의 감정이기 때문이지요.

누구든지 감동적인 멜로영화의 한두 장면쯤은 기억하고 있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시대에 따라 사랑의 표현 방식이 다소간 바뀔지 몰라도 사랑의 감정만큼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변함없이 작동하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멜로영화는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안정적인 흥행결과를 가져다주는 주요 소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제작된 많은 멜로영화들이 영화팬들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주거나 진한 여운을 남겼으며, 더러는 눈물콧물을 쏙 빼기도 했습니다.

 

이 컬럼에서 소개한 영화들만 해도 편지’(1997, 이정국 감독) ‘접속’(1997, 장윤현 감독)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속’(1998, 김유진 감독)을 비롯해 동감’(2000, 김정권 감독) ‘파이란’(2001, 송해성 감독) ‘번지점프를 하다’(2001, 김대승 감독) ‘클래식’(2003, 곽재용감독) ‘너는 내 운명’(2005, 박진표 감독) 등이 모두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멜로영화들과는 조금 색깔이 다른, 대부분의 멜로영화들이 영화팬의 심금을 울리는 신파적 기법을 차용한 것과는 달리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1999, 허진호 감독)입니다. 한국 멜로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로 남녀 주인공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는 연출의 섬세함이 돋보였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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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으로 등장, 촬영 초기부터 영화계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한적한 서울 변두리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30대 사진사 정원(한석규)이 남자 주인공입니다. 밝은 미소를 늘 머금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순수함도 간직한 평범한 남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다가오는 겨울이면 세상과 이별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에 다녀와 힘들어하던 그에게 사진을 빨리 인화해달라고 독촉하는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이 나타납니다. 힘들어하던 정원은 다림의 독촉에 쌀쌀맞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미안함을 느끼고 아이스크릠을 사서 건네주며 사과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이후 다림이 주차단속 사진을 인화하러 정원의 사진관에 자주 들르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원에게 호감을 느낀 다림은 정원에게 놀이공원을 놀러가자는 등 자신의 마음을 거침없이 표현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정원 역시 다림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커져가는 사랑의 감정이 두렵기만 합니다.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그로서는 20대 초반의 다림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기가 부담스러운 거지요.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쌓아가던 중, , 정원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게 되고, 이런 사정을 모르는 다림은 갑작스럽게 문닫힌 사진관 앞을 서성거립니다.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사라진 정원에게 마치 돌을 던지듯 사진관 유리창을 향해 던집니다.

 

하지만 얼마 후 다른 곳으로 파견근무를 떠나게 된 다림은 사진관 문 틈에 편지 한 통을 꽂아놓습니다.

한참 뒤, 병원에서 퇴원한 정원은 사진관 문 틈에 꽂힌 다림의 편지를 읽고, 곧바로 답장을 씁니다. 하지만 그 답장을 다림에게 보내지는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다림이 초조한 얼굴로 사진관을 다시 찾아옵니다. 문 닫힌 사진관 안을 조용히 들여다보던 다림의 얼굴에 갑자기 환한 웃음이 피어납니다. 사진관 진열장에는 밝게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던 겁니다.

 

하게 웃는 다림이의 클로즈업된 얼굴 위로 정원의 독백이 흐릅니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다림이에게 썼던 편지, 그러나 부치지 않았던 편지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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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단속요원 다림이 역을 맡았던 심은하. 당당하고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잘 표출해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이렇듯 정원과 다림의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냈습니다. 죽고 못사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가 죽기 얼마 전에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지극히 신파적인 스토리라인을 지니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냄으로 오히려 슬픔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평범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의 관계를 차분하면서도 섬세한 터치로 카메라에 담아냈을 뿐인데, 관객들은 그 사랑이야기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화는 전혀 눈물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관객들이 스스로 눈물을 훔치고 말았던 겁니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절제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을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 플레이어 사용법을 일러주던 정원이와 아버지의 장면은 그야말로 폭풍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정원이 벌컥 화를 내는 겁니다. 그 뒤의 대사는 없지만 내가 죽고나면 어떡하시려고 그것도 못하세요?”라는 걸 관객도, 정원이의 아버지도 아는 거지요. 끝내 정원이가 비디오 작동법을 글로 남긴 뒤, 방 안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열하는 걸 방 문 앞에서 아버지는 멍하니 서서 바라봅니다. 질척한 감정들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당연하게 알아채고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심지어 ‘8월의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20여분에는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문 닫힌 사진관 앞을 서성거리다가 편지를 꽂아놓고 떠나는 다림이의 모습,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사진관을 찾아온 다림이의 환한 미소 가득한 얼굴에 이르기까지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의 음악과 함께 정원의 내레이션이 전부였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엄청난 성취를 거두었습니다. 상업영화로서 커다란 흥행성공을 거두었으며, 1999년 한 해 동안 여러 영화제에서 수많은 수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것을 비롯해 허진호 감독은 데뷔작으로 신인감독상과 시나리오상 등을 휩쓸었으며, 한석규와 심은하는 남녀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중에서도 시간이 흐른 뒤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상미라는 평가를 들었던 유영길 촬영감독이 청룡영화상 촬영상을 수상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될 무렵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결국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이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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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로 설정된 촬영지는 전북 군산시였다. 지금은 '초원 사진관' 세트가 군산시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무대가 되는 곳은 서울 변두리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촬영된 곳은 전라북도 군산이었습니다. 정원(한석규)이 운영하는 사진관과 주차단속 관련 장면들은 군산시에 초원 사진관세트를 짓고 촬영했습니다.

결국 ‘8월의 크리스마스의 흥행성공과 호평 때문에 영화 속의 초원 사진관은 그 이후 군산시에 의해 관광상품으로 보존되어오고 있습니다. 군산시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의 하나가 초원 사진관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가고 있지요. 초원 사진관 안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 때 사용됐던 시계와 선풍기, 사진촬영소파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화의 스틸컷들도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초원 사진관 바깥 길 옆에는 영화 속에서 주차요원이었던 다림(심은하)이 타고다니던 주차단속 차량(포니자동차)도 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 주차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초원 사진관과 다림이의 주차단속차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길게 줄을 서는 풍경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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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에서 촬영중인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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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담배피우는)과 촬영 앞두고 의견을 나누는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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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1997년, 장윤현 감독)에 이어 다시한번 멜로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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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는 심은하 스스로 최고의 출연작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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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에서 의견을 나누는 허진호 감독(가운데)과 한석규(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