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첫사랑`

기사입력 [2018-03-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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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인정 사정 볼 것 없다’(1999) 등의 영화로 명성을 떨쳐온 이명세 감독이 2011년 광화문 미로 스페이스에서 열린 스타일의 거장- 이명세 감독 특별전에 참석해 자신의 영화인생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개그맨처럼 데뷔하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처럼 나의 사랑 나의 영화를 만들었고, 언제나 영화에 대한 첫 사랑을 잊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남자는 괴로워였고, 그래도 영화와 지독한 사랑을 했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처럼 저돌적으로 20세기말까지 달려갔습니다

자신의 영화인생을 유머넘치게 잘 표현해냈지요. 이명세 감독의 특별전에 참석했던 많은 영화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감독의 영화는 첫 작품 개그맨부터 줄곧 일관된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독특한 미감과 미장센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에는 하나둘씩 추종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들에 의해 그의 이름 앞에는 스타일의 거장이라거나 스타일리스트라는 닉네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하는 첫 사랑’(1993)은 특히 이 감독의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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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여주인공 영신(김혜수)과 창욱(송영창)의 상상속의 데이트 장면.


당시 동국대 연영과 1학년이었던 김혜수는 여주인공으로 결정되고난 뒤, 이 감독에게 감독님, 이 영화의 테마가 뭐예요?”라고 당돌(?)하게 물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부터 카메라 앞에 서왔던 구력에서 나온 자신감 같은 거였죠. 그런데 이 감독은 전혀 언짢아하는 기색 없이 첫 사랑이라는 열쇠를 통해 본 시간의 비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김혜수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훗날 첫 사랑의 특별상영전 자리에서 이 에피소드에 대해 감독님이라고 시()적으로 이야기한다. 얼굴은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되게 있는 척 한다고 생각했어요라면서 웃으며 회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첫사랑은 실제로 이 감독의 설명처럼 첫사랑이란 못잊어하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는 걸 아름다운 영상에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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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이 감독은 연극작품처럼 느껴질 만큼 오밀조밀한 세트에서의 촬영을 많이 했습니다. 워낙 세트에서의 촬영을 선호하는 이 감독의 취향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영화 전체 분량 중 세트에서의 촬영된 분량이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도 가끔씩은 과장된 듯한, 연극적인 요소를 적잖이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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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에서는 여주인공 영신(김혜수)의 상상을 따라 펼쳐지는 장면이 많았다. 창욱(송영창)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영신(사진 아래)의 모습 역시 상상 속의 장면이다.   

 

영화의 내용은 주인공 영신(김혜수)의 상상과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신과 그녀가 사랑한 창욱(송영창)과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라 창욱에 대한 영신의 감정과 상상의 추억을 따라서 펼쳐졌습니다. 영신의 상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판타지 기법들이 동원됐습니다. 마음 속의 대사를 말풍선으로 그려넣는다거나 애니메이션, 화면합성 등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해 아기자기한 판타지영화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영화계에는 CG, 이른바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사용하지 않던 때여서 이 감독의 판타지 장면들은 우습게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해야 했습니다. 공중에 뜨는 주전자 장면을 찍을 때는 스태프들이 줄을 매달아 당긴다거나 빈 자전거가 달리는 장면도 낚시줄을 매달아 당겨가며 찍었던 겁니다.

 

그렇게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서 판타지 장면을 만들어냈으니, 이 감독의 연출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왜 그에게 스타일리스트라는 닉네임이 붙게 됐는지도 말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벚꽃이 활짝 핀 가로수길, 첫 키스를 나눈 안개낀 공원벤치,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그 집 앞 등 영신을 둘러싼 풍경들은 하나같이 예쁜 우편엽서 같았습니다. 사랑에 빠진 영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토대로 삼아, 거기에서 비롯되는 영신의 상상의 나래를 이 감독 특유의 몽환적인 스타일로 펼쳐낸 결과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처음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제작사(삼호필름)에서는 여주인공으로 최진실을 1순위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은 소설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처럼 소년같은 느낌의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담다디라는 대중가요로 인기를 끌고 있던 가수 이상은을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주인공 캐스팅 문제를 놓고 제작사와 의견대립을 보이던 이 감독은 대안으로 김혜수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김혜수는 데뷔작 깜보’(1986, 이황림 감독)로 눈길을 끌었던 기대주로 영화와 방송을 오가며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치며 막 대학에 진학한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에 비해 원숙한 여인의 연기를 많이 해왔던 터라 제작사의 반대가 만만찮았습니다. 거기에다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수련해온 태권소녀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과연 첫 사랑의 영신 역할에 잘 어울리겠느냐는 기우였던 거죠. 아닌 게 아니라 김혜수에게는 씩씩한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이 감독은 제작사에 김혜수의 눈을 봐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커다란 눈망울, 호기심어린 눈빛, 첫사랑에 빠진 순수한 눈빛 등을 봐달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여주인공 사진 테스트할 때는 김혜수의 몸을 모두 다 가리고 눈만 찍었습니다. 다양한 상황과 표정을 주문하고, 거기에 따른 눈빛만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것을 통해 제작사들의 반대를 이겨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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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김혜수)의 상상이 사실처럼 펼쳐진 장면들. 

  

지방대학 미대에 갓 입학한 영신(김혜수)은 어느날 학교 연극반 연출자로 초빙된 창(송영창)에게 시선을 빼앗깁니다. 연신 담배만 피워대는 골초에 술꾼일 뿐이 창욱의 모습이 영신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겁니다. 창욱의 몸짓 하나도 예사롭지 않고, 창욱의 모든 말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었습니다. 창욱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긴 영신은 용감하게 데이트를 신청합니다만 그만 바람을 맞고 맙니다

 

하지만 영신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창욱의 하숙집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날 밤 창욱의 키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첫 키스만을 남긴 채 창욱이 서울로 떠나가자, 영신은 뒤따라 창욱을 찾아갑니다. 마침내 창욱의 집에 이르러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있는 창욱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 창욱은 영신의 학교에서 연극공연을 마치고 아주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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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오른쪽)에게 영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이명세 감독(왼족).

  

동화같은 화면과 첫사랑의 심리가 마술처럼 펼쳐진 영화 첫사랑에는 특히 여름 바닷가에서 누구나 한번쯤 부르곤 했던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연가를 비롯해 송창식의 히트넘버 맨 처음 고백’, 그리고 이장희의 그애와 나랑은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추억의 노래들이 영화 속의 상황들과 어울려 풋풋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첫 사랑의 감정은 아무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신 역을 깜찍하게 펼쳐낸 김혜수는 그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당시 김혜수의 수상이 유난히 의미있게 기억되는 이유는 이처럼 공들여 찍은 영화 첫사랑의 흥행성적이 참담했기 때문입니다. 개봉관인 명보극장에서 2주 동안 5천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설명했던 것처럼 첫사랑은 개봉 이후 오히려 영화 매니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이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감독의 열혈팬들 사이에서는 첫사랑저주받은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당시에는 신인급이었으나 지금은 정상급에 올라선 배우들의 면면을 잠깐씩 만나게 되는 잔잔한 재미도 안겨줍니다. 영화 속 영신의 동료들로 철학과 유오성도 나오고, 예지원도 단역으로 출연했습니다. 이 감독의 동료 감독들인 가문의 영광의 정흥순 감독, ‘구멍의 김국형 감독,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의 구임서 감독 등이 단역으로 잠깐잠깐 얼굴을 비칩니다.

 

그리고 얼마전 불미스러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조민기가 여주인공 영신을 좋아하는 문수 역으로 꽤 열연했던 것 또한 쓸쓸한 기억으로 남게 됐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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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의 촬영 중 절반 이상이 이처럼 세트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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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이 직접 그린 촬영용 콘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