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토리

[이창세의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사의 찬미`

기사입력 [2017-11-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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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1920년대 신여성으로 자유연애의 선구자였으나 끝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했던 비련의 여가수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1절 가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라는 노랫말을 더 잘 알고 있지요. 굴곡진 인생사를 겪다보면 아무래도 인생무상이라거나, 아니면 회한이나 허무의 감상에 젖어들기 쉬운 까닭이겠지요. 이 노래는 원래 러시아의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의 번안한 겁니다. 1926년 일본 오사카의 닛토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취입을 의뢰받은 윤심덕이 이 곡을 하나 더 녹음하고 싶다고 요청해서 수록됐습니다. 이 곡에 붙일 한국어 가사도 직접 썼습니다. 반주는 피아노를 치던 여동생(윤성덕)이 했습니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지금까지도 들리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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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에서 윤심덕(장미희)을 흠모했던 홍난파 역의 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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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장미희)과 김우진(임성민)의 격정적인 사랑을 멀찍이 바라보는 친구로 만족해야 했던 홍난파(이경영,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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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의 일본 교토 촬영현장. 와세다 대학 캠퍼스로 설정된 장면.

  

윤심덕은 성악을 공부하러 간 일본에서 김우진을 만났습니다. 윤심덕은 당시 동경의 한국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였습니다. 음악적 재능 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스타일의 외모와 당당한 성품 등으로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죠. 작곡가 홍난파, 채동선 등이 그녀와 가깝게 교류하며 지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유학생은 윤심덕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대범하게 행동하던 윤심덕 앞에 운명처럼 김우진이 나타난 겁니다. 윤심덕과는 반대로 차분한 성격의 김우진은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재학중이었습니다. 호남 거부(巨富)의 아들로 고향에는 처자도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윤심덕에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김우진 등 동경유학생들의 신극 운동(극예술협회)을 함께 하면서 두 사람은 더욱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에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집안의 부름에 김우진이 귀국길에 오르자 윤심덕도 서양음악을 전파하겠다는 기대를 안고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이별을 가져왔습니다. 김우진은 고향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지만 윤심덕은 무척 분주한 활동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반달‘(1920)이 불려지고 애수라는 외국곡에 봉선화가사를 붙여 불려지던 시절이니. 성악을 전공한 윤심덕의 존재는 단박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크고 작은 무대에서 풍부한 성량으로 당당하게 노래하는 윤심덕의 공연은 신문잡지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만장의 관즁을 취케하든 일류셩악가 윤심덕양”(1924517일 조선일보) 등의 문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음악활동이 윤심덕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친일파의 연회초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그 어려움은 더 커졌죠. 그래서 몇몇 재력가들로부터 혼담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는 김우진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한때 윤심덕을 갈등하게 했지만 역시 이또한 거절했습니다.

윤심덕이 아무개의 애첩이 된다더라는 식의 애꿎은 소문이 장안에 무성하게 퍼지면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윤심덕에게 마침내 김우진이 찾아옵니다. 토월회에서 연극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지요. 윤심덕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김우진을 따라나섰습니다만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녀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도 뒤따랐습니다. “서양음악을 한다더니 웬 광대?”라는 식의 비아냥이었죠. 이같은 구설과 비아냥 때문인지 윤심덕도 연극배우로서는 그다지 성취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닛토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취입 제안을 받게 되자 윤심덕은 다시 모든 걸 버리고 일본으로 날아갑니다. ‘사의 찬미도 이때 녹음하게 됐지요. 녹음 당시 윤심덕이 얼마나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했는지 녹음실에 있던 엔지니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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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선 감독(왼쪽)과 장미희(오른족)는 영화 '겨울여자' 이후 14년만에 '사의 찬미'에서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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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서 이루어진 와세다 대학 캠퍼스 장면의 촬영현장. 

  

윤심덕이 일본 오사카에서 녹음하고 있을 때, 김우진도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 집안의 반대에 낙심하여 일본 동경으로 가출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날라온 윤심덕의 전보를 받고 한걸음에 윤심덕을 찾아가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북해도로 여행을 떠나 오랜만의 편안한 쉼을 갖습니다. 아마 이 시절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게 사랑하며 행복을 느꼈던 시간일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192685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립니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 남녀의 정사>-- “지난 3일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를 조사한 결과 여자는 성악가 윤심덕(30), 남자는 김우진(30)씨로 밝혀졌다.”

윤심덕의 사후, 출반된 유작음반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결사(決死)의 절창(絶唱)--‘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蒼海)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쏘푸라노명가수 고() 윤심덕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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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는 장미희의 열연이 빛난 영화였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그해 대종상, 청룡영화상, 춘사영화예술상, 심지어는 아태영화제의 여우주연상까지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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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역의 이경영 역시 그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사의 찬미’(1991, 김호선 감독)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던 윤심덕과 호남 거부의 아들로 신극 운동에 앞장섰던 김우진의 짧지만 불꽃과도 같았던 사랑의 찬가로 그려졌습니다.

1926년 여름 경성, 윤심덕의 자살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지자 윤심덕과 김우진의 측근중의 한 사람인 홍난파가 비통한 심경으로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 이별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파스텔톤의 화면으로 펼쳐냅니다. 김호선 감독은 이해타산으로 가득한 요즘의 사랑을 각성해보자는 의미에서 복고주의적 사랑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는데요, 비평가들 역시 감독의 연출의도가 잘 살아났다고 평가했습니다. 관객들로부터도 꽤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20만명 가까운 관객동원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1991년도 한국영화 흥행3위에 해당합니다.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윤심덕 역을 맡았던 장미희의 열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미희는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여배우 트로이카(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중 한 명이었으나 김호선 감독과 함께 작업한 겨울여자’(1977)의 빅히트를 계기로 독주체제를 구축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겨울여자는 여성의 성도덕성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서울의 단성사에서만 585천명이라는 관객동원 신기록(당시)을 세웠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장미희는 80년대 중반부터 독보적인 히로인으로 우뚝 섰으며, 배창호 감독과 적도의 꽃’(1983) ‘깊고 푸른 밤’(1985) ‘황진이’ (1986) 등을 통해 장미희 카리스마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김호선 감독과 사의 찬미에서 다시 만나 겨울여자에 이어 또한번 시너지를 이뤄낸 거죠.

사의 찬미에는 김우진 역의 고() 임성민, 홍난파 역에 이경영 등이 주연으로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들 모두 나름대로 연기 공력을 지닌 배우들이었는데, “장미희의 카리스마에 압도됐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특히 조각 미남배우임성민은 일본 교토촬영현장을 취재중인 필자에게 베드신 연기라면 신물 날 만큼 많이 찍어봤는데, 장미희씨랑 찍는 베드신에서는 왜 그렇게 주눅이 드는지 모르겠다윤심덕과 김우진의 마지막 정사 장면촬영의 어려움을 쑥스럽게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사의 찬미는 그야말로 상복이 터졌습니다. 김호선 감독이 대종상(감독상)에서, 임성민은 청룡영화상(남우주연상), 이경영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상(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윤심덕의 장미희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춘사영화예술상, 심지어는 아태영화제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재미난 에피소드 한 토막도 이때 나왔습니다. 장미희가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소감을 말했지요. 보통의 수상소감과는 달랐지만 장미희로서는 당시 여우주연상 후보였던 선배 김지미와의 경쟁을 이겼다는 기쁨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상멘트는 얼마 후 개그프로그램에서 희화화되기 시작해서 한동안 장안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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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촬영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김호선 감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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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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