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기사입력 [2017-10-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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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작가였던 고() 최인호의 단편소설 가운데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던 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였던 그는, 산업화의 격랑에 휩쓸린 한국 사회의 변동과 개인의 문제를 많은 소설 속에 담아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시 만날 때까지해외입양을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한 소설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생겨난 고아들과 또 전쟁 직후의 어려운 생계로 인해 양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해외입양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해외입양을 두고 한국의 인기 수출품목이란 비아냥과 함께 고아수출국이란 오명까지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미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를 비행기에서 돌봐주는 대신 비행기삯을 싸게 지불하는 입양아 에스코트 서비스를 신청한 주인공이 기내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입양아 에스코프 서비스를 신청할 때부터 툴툴거리기 시작해 기내에서 아이를 돌보면서도 계속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입양되는 아이의 사연을 상상하게 되면서, 애잔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분히 감상적인 터치의 소설입니다만 독자들에게 해외입양 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줬던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 장길수 감독)은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신유숙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수잔 브링크의 사연은 1989MBC TV의 특집극 우리는 지금- 해외 입양아편의 마지막 입양아로 소개되면서 알려졌습니다. 네 살 때 스웨덴으로 입양된 수잔 브링크는 양부모 밑에서의 고달픈 생활과 성인이 된 후의 파란만장한 인생살이 등을 방송에서 진솔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녀의 모진 삶을 TV를 통해 접하게 된 국내 시청자들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훔쳤지요. 그녀의 사연은 금세 화제가 됐고, 마침 이 방송을 본 친모가 방송국으로 연락하여 극적인 상봉도 이뤄졌습니다. 이 눈물의 상봉 장면 또한 전국적으로 방송을 타면서 온국민은 눈물깨나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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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 때 스웨덴으로 입양된 수잔 브링크(최진실)은 어린 시절, 양모의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불과 열세 살의 나이에 자살을 시도하는 아픔을 겪는다. 

 

장길수 감독은 방송을 보자마자 곧바로 영화화를 결심했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외국문화, 특히 미국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우리 전통문화의 붕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영화화하는 데 집중해온 장 감독에겐 또다른 도전이었던 겁니다. 장 감독은 유우제 작가와 시나리오를 쓰면서, 캐스팅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수잔 브링크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 훈련이 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영어도 아니고 스웨덴어였으니, 적잖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인 고() 최진실이 여주인공으로 결정됐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깜찍한 대사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은 전자제품 광고모델을 시작으로 그녀가 나오는 건 모두 성공이 보증되던 터라 앞다퉈 그녀를 찾을 때였습니다. 당시 장 감독은 주인공의 불행한 삶을 연기하는 것이나, 한국말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영어도 아닌 스웨덴어로 연기하는 것 등 쉽게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는데,자기가 해보겠다고해서 깜짝 놀랐다며 최진실 캐스팅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최진실은 자신의 신드롬이 거세게 일던 시절, 스스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 것이었지요. 그녀는 촬영 시작하기 전부터 스웨덴에서 3개월여를 살면서 스웨덴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영화 속의 긴 대사들은 발음을 한글로 써서 아예 외워서 연기했지요. 장 감독을 비롯한 제작스태프, 심지어는 스웨덴 현지 배우들까지도 최진실의 이같은 열의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최진실의, 최진실에 의한, 최진실을 위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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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가 되어 양부모의 집에서 나와 자립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동거하던 남자친구의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수잔 브링크(최진실). 더군다나 그 남자친구로부터 버림받기까지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실제 입양아들의 인터뷰가 다큐멘터리처럼 나옵니다. 처음부터 관객의 가슴을 후벼팝니다. “나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보내졌대요라는 청년의 무덤덤한 표정, “출생년도나 생일은 몰라요라는 여대생의 어색한 미소, 그리고 이어지는 스무살 난 덴마크 입양 여성의 솔직한 심경고백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날 낳아준 엄마를 증오해요. 자기 자식을 버리다니,,, 친모가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았으면 해요. 내가 복수할 수 있도록,,,만약 결혼해서 부자로 살고 있다면 가정을 파괴하고, 가난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 얼굴에다 침을 뱉겠어요

  

수잔 브링크의 입양일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963년생 네 살짜리 신유숙은 이유도 모른 채 스웨덴의 항구도시 노르쉐핑에 도착하여 수잔 브링크라는 새 이름으로 험난한 삶을 시작합니다. 양모의 차별 대우와 심한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불과 열세 살의 나이에 첫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18세 되던 해에 자립한 뒤에는 한국의 친모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합니다. 오히려 동거하던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출산하고나서, 그에게 버림받기까지 합니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미혼모의 삶에 절망한 그녀는 또다시 자살을 시도하는데, 하늘은 이번에도 그녀의 삶을 거둬가지 않습니다. 다시 눈을 뜨게 된 수잔이 자신의 딸아이한테 마치 독백처럼 중얼거립니다. “엄마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버림을 받았단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았고,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배신하고 떠나갔단다이 대목에서 관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후 수잔은 한 스웨덴 선교사의 도움으로 종교를 통해 삶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갑니다. 그리고 한국 방송사 MBC TV의 특집극 지금 우리는- 해외 입양아편에 그녀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수잔 브링크의 처연한 인생이 한국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방송이 나간 후, 한국의 친모와도 연락이 되어 딸과 함께 한국에 와서 친모와 해후하고 긴 방황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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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난 뒤, 또다시 자살을 시도했던 수잔 브링크(최진실).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종교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지를 키워나가던 중, 한국 방송사(MBC TV)의 특집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게 된다.

  

아마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한국전쟁 이후 해외입양이 시작된 지 40년이 되도록 방치되어왔던 해외 입양아 문제를 처음으로 심도있게 다룬 영화로 기록될 겁니다. 실제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 방송에 이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흥행 또한 제법 성공하게 되자 해외 입양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로만 여겼던 데서 해외입양 문제가 사회적으로 풀어야할 과제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들도 대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해외 입양에서 국내 입양으로의 전환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영화의 힘이겠지요.

  

역시 숨은 공로자는 수잔 브링크 역을 맡았던 최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진실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수잔 브링크 역에 도전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녀의 오래된 매니저(() 배병수)는 완강하게 출연을 반대했습니다. 전체 촬영 분량의 90% 이상을 스웨덴 현지에서 촬영하려면 최소 2개월을 머물러야 하는데, 더군다나 스웨덴어를 배우기 위해서 3개월 더 일찍 가서 준비해야 하는데,,,, 당시 최진실의 스케줄은 일분일초를 쪼개 써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매니저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대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매니저도 최진실의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그 매니저는 처음에는 스웨덴을 폭파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는데, 5개월 동안 그곳에서 촬영을 핑계로 지내다보니까 의도하지 않게 재충전하는 기회가 됐다며 웃었습니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에서의 좋은 인연으로 최진실과 그의 매니저는 장길수 감독의 다음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도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PS.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신유숙씨는 2009년 암투병 끝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처음 스웨덴에 입양되었던 항구도시 노르쉐핑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합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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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오른쪽)은 수잔 브링크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촬영하기 3개월 전부터 스웨덴에 머물며 스웨덴어를 배웠다. 촬영기간 2개월을 포함해서 무려 5개월 동안 스웨덴에서 지냈던 최진실은 훗날, "오히려 재충천의 기회가 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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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스웨덴 촬영을 위해 모인 한국의 제작스태프들.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최진실. 스태프들과 담소를 나누는 장길수 감독(앞줄 오른족)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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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