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아제 아제 바라아제`

기사입력 [2017-10-1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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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이라는 여배우의 이름 앞에는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어다닙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영화가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는 해외 무대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평가라기 보다는 한국영화 그 자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간혹 김승호 주연의 마부’(1961, 강대진 감독)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했다거나 화녀’(김기영 감독)의 여주인공 윤여정이 영화제 이름도 생소한 시체스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거나 하는 뉴스가 들려오긴 했습니다만 그야말로 특별상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절이던 1980년대에 강수연이 한국영화의 존재를 국제무대에 알리는 견인차로 우뚝 섰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남녀차별과 계급사회의 부조리를 대리모의 이야기로 풀어낸 영화 씨받이’(임권택 감독)에서의 열연으로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89년 역시 칸, 베를린, 베니스와 더불어 세계 4대 영화제로 일컬어지던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에서의 삭발 열연으로 또한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여배우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연거푸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 강수연의 이름 앞에는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을 수밖에 없었죠. ‘배우 강수연본인에게는 당연히 영광스런 수식어입니다만 이는 덩달아 한국영화 전체의 위상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씨받이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연이어 연출한 임권택 감독에 대한 해외영화계의 관심과 평가 또한 높아졌습니다.이후 월드스타 강수연의 존재만으로도 한국영화는 국제무대에서 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강수연의 이같은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 이후 한국영화의 해외진출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강수연에게 확고한 월드스타의 지위를 안겨준, 그리고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영화가 아제 아제 바라아제입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 경전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반야심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로서, ‘가자 가자 저 피안의 세계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화는 한승원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한승원 작가가 임권택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 감독에게는 이전의 불교영화인 만다라’(1981)와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이 무산됐던 김지미 주연의 비구니’(1984)를 합쳐놓은, 이른바 불교에서의 수행이라는 주제를 집약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초월적인 이상세계를 좇는 비구니 진성(진영미)과 파계하고 맨몸으로 세속을 떠도는 순녀(강수연)의 삶을 대비하여 보여주면서 과연 참 구도의 길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결코 쉽지 않은 주제의 이야기입니다만 임권택 감독은 두 비구니(진성 VS 순녀)의 다른 수행방식을, 진영미와 강수연의 절묘한 연기 하모니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펼쳐냈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재미와 더불어 극적 긴장감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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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행자 시절을 끝내고 마침내 '청화'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기 위해 삭발하는 순녀(강수연)와 순녀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은선스님(윤인자).

  

고등학생 순녀(강수연)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억척스런 어머니의 속박, 그리고 존경하는 현종(유인촌) 선생님과의 관계가 주변의 오해를 불러일으키자 집을 떠나 덕암사로 찾아듭니다. 출가한 아버지 윤봉(전무송)을 찾아온 것이지만 순녀는 은선스님(윤인자)의 제자가 되기로 합니다. 은선스님의 또다른 제자 진성(진영미)은 순녀에게 죄인을 문초하듯 절에 온 이유를 묻습니다. “부모님께 꾸중 들었나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나요?”

순녀는 씁쓸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자 진성은 언성을 높입니다. “절은 수도하는 곳입니다.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하거나 죄짓고 도망친 사람들의 은신처가 아닙니다

순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진성과 함께 비구니 생활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살을 시도하던 현우(한지일)를 만류하게 되는데, 현우는 자신을 살려놓았으니 책임지라면서 매일같이 순녀를 찾아와 생떼를 부립니다. 현우의 소란에 은선스님은 순녀에게 삼천 배를 지시합니다만 현우의 생떼는 계속됩니다. 하는 수 없이 은선스님은 순녀를 산문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순녀는 파계 아닌 파계를 하게 되고, 현우와 광산촌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짧은 평안도 잠시 현우는 막장 붕괴로 죽고, 순녀는 남해안 비금도의 어느 의료원에서 간호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의료원의 응급차를 운전하는 송기사(안병경)와도 잠시 동거생활을 하지만 송기사 또한 사고로 죽습니다.

송기사의 죽음으로 순녀는 다시 덕암사를 찾습니다. 은선스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 속세에 나가 인간의 아픔을 체득한 순녀를 수도자로 받아들이라고 유언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합니다. 결국 순녀는 은선스님의 다비식을 끝낸 후, 은선스님의 뼈를 수습하여 세상에서 중생을 구하겠다며 절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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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구니가 되기 위해 삭발하는 장면의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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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 장면 촬영 도중 잠시 쉬는 시간. 강수연의 표정이 무척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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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발 투혼으로 열연한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강수연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이어 또다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자신의 구도만이 중요하다는 진성과 중생을 구원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려는 순녀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물론 임권택 감독은 후자, 즉 순녀의 수행방식을 지지합니다. 다만 순녀의 이 방식은 보이지 않는 연()’에 의해 이끌리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남자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성적(性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과거 만다라에서는 남자 수도승들이 등장한 데 반해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는 비구니들이 등장하여 성차’(性差)를 드러내고 있는 거지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 앞서 1984년 김지미의 삭발 등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나 제작 무산됐던 비구니을 풀었다고나 할까요.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인연, 자비와 구원, 해탈 등 불교의 가르침을 잘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월드스타 강수연의 삭발투혼 연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입니다. 이미 씨받이로 월드스타의 닉네임을 가졌고,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1987, 이규형 감독)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송영수 감독), ‘감자’(1987, 변장호 감독),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장길수 감독) 등의 영화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더군다나 여배우에게 삭발이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행자 시절을 마치고 청화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기 위해 삭발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강수연의 눈망울에는 이슬이 맺혔습니다. 영화 속의 장면인 것 같지만 또한 실제로 강수연의 당시 심경을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스물네 살의 처녀로서는 소화하기 쉽지 않은 연기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직 볼살이 채 빠지지 않은 여고생의 모습에서부터 수행에 정진하는 비구니, 세속에 적당히 물든 아낙네, 그런가하면 만만찮은 노출이 요구되는 베드신에 이르기까지 강수연의 천의 얼굴이 영화 전편을 수놓았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 영화에서 강수연과 대비되는 비구니 진성역을 참신하게 연기했던 진영미는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는데, 이 영화 출연 이후 MBC TV드라마 천사의 선택’(1989)에만 출연했을 뿐 연기활동을 그만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해 백상예술대상과 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영화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미완의 대기로 평가받았던 그녀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순녀를 괴롭히는 현우 역의 한지일은 임권택 감독의 속을 무던히도 썩인 배우로 기억됩니다. 당시 한지일은 임권택 감독과 한 동네에 살면서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데, ‘길소뜸에 이어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도 캐스팅되어 비교적 비중있는 역할(현우)을 맡았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의 현우는 순녀(강수연)와의 연기 하모니가 매우 중요했고, 또 그만큼 심리연기를 필요로 하는 터라 임 감독의 연기 완성도에 대한 욕구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지일이 촬영기간 내내 무던히도 NG를 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촬영날인가는 얼마나 NG를 많이 냈는지 임 감독이 구중모 촬영감독에게 내가 저놈을 다시 배우로 쓰면 사람이 아니여라면서 장탄식을 했다는 일화는 당시 촬영현장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말에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임 감독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으며 영화를 찍었던 한지일 역시 그해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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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녀 역의 강수연과 대비되는 캐릭터인 비구니 진성을 연기한 진영미.

참신한 이미지와 신선한 연기로 그해 백상예술대상과 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