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세의 무비스토리

[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그들도 우리처럼`

기사입력 [2017-10-1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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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10,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 박중훈 심혜진 문성근 주연)이 개봉됐습니다. ‘칠수와 만수’(1988)로 데뷔한 박광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영화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전작 칠수와 만수에서 구조적인 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박 감독이 과연 그들도 우리처럼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었죠. 한국영화사에서 이른바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칠수와 만수에 이어 박 감독의 넥스트 스텝은 얼만큼 더 나아갔을까, 아니면 아직 군사정권의 잔영 아래 놓여있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다소나마 위축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 등에 대한 궁금함이었습니다.

결과는 박 감독의 마이 웨이였습니다. 서슬 퍼런 시절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해보려는 당시의 노태우 정권이 그해 1, ‘3당 합당’(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쇼까지 벌였던 상황이었기에 박 감독의 마이 웨이는 더욱 돋보였습니다. 특히 그들도 우리처럼의 개봉 직전인 10월에는 노태우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사회의 공기 또한 복잡미묘하게 짓눌리던 분위기였던 터라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 특히 젊은 층의 환호와 지지는 박 감독의 이전 작품 칠수와 만수때보다 더욱 뜨거웠습니다.

 

사실 그들도 우리처럼은 영화화 기획 단계부터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노동문제를 집약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시위 주동혐의로 수배중인 대학생 기영(문성근)이 탄광촌에 숨어들어 마주하게 되는 막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실상을 담아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영화계의 제작 풍토에서 이같은 소재를 영화로 옮긴다는 건 무모한 시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박 감독의 전작 칠수와 만수가 이미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아내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던 터라 제작사(동아수출공사)에서도 박 감독에 대한 믿음을 다시한번 보냈던 겁니다.

 

캐스팅도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칠수와 만수를 통해 박 감독의 영화관과 연출의도에 대해 공감과 지지를 갖게 된 박중훈은 출연 제의를 받자마자 오케이했습니다.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심혜진도 그때까지는 이제 막 영화에 진출한 모델출신의 신인급 배우였고, 문성근 역시 연극 칠수와 만수에 출연했던 연극배우로서의 경력이 전부였던 터라 박 감독의 출연 제의에 오히려 고마워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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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오토바이를 요란하게 끌고 다니며 탄광촌의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술집과 다방에서도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루는 성철 역의 박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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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중훈은 이 영화를 통해서 '거친 반항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며 캐릭터의 외연 확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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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수와 만수'를 찍으면서 박광수 감독의 영화관과 연출의도에 절대적 공감과 지지를 갖게 된

박중훈은 자연스럽게 '그들도 우리처럼'에도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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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도 우리처럼'이 프랑스 낭뜨 제3대륙 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여배우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심혜진.

 

영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기영(문성근)을 걱정하는 그의 어머니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기차가 터널을 벗어나자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기영의 어두운 표정이 드러나고, 시위 주동 혐의로 수배중인 그는 폐광 직전인 강원도의 탄광촌으로 숨어듭니다. 연탄공장의 잡역부로 위장취업한 그는 연탄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을 쥐고 흔드는 연탄공장 사장의 아들 성철(박중훈)과도 마주합니다. 잘 알지 못하는 기영에게 이유없이 호의를 베푸는 성철. 그러나 그는 기영을 제외한 노동자들은 물론 술집과 다방에서도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폭군으로 군림합니다.

 

기영은 성철과 함께 다방에 갔다가 티켓을 팔며 살아가는 영숙(심혜진)을 보게 됩니다. 영숙은 성철의 폭력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지만, 무거운 침묵의 기영에게 알지 못할 호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성철의 폭행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영을 사랑하게 되면서 영숙은 티켓 파는 일을 그만 둡니다. 탄광촌의 파업 분위기와 함께 잠시나마 기영과 영숙의 사랑도 깊어갑니다.

 

어느날 다방에서 행패를 부리던 성철은 티켓 팔기를 거부하는 영숙을 폭행합니다. 이를 말리던 기영은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경찰에 잡혀가는데, 신분이 탄로나기 직전에 무혐의로 풀려납니다. 하지만 이내 위장취업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기영은 또다시 도피길에 오르게 됩니다. 영숙도 기영을 따라 떠나기로 합니다만, 짐을 가지러 다방에 갔다가 성철에게 붙들리고 맙니다. 영숙은 막무가내로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성철에게 순간적으로 칼을 휘두릅니다. 결국 영숙은 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기영을 뒤로 하고,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기영은 다시 도피를 위해 탄광촌을 떠나는 기차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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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칠수와 만수'에 이어 또다시 박중훈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박광수 감독(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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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한국영화사에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들은 박광수 감독(가운데). 촬영에 앞서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박중훈(왼쪽)과 문성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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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과 고한 등지에서 두달여 동안 촬영된 '그들도 우리처럼'은 폐광 직전의 탄광촌을 무대로 한 영화의 특성상 촬영현장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박 감독은 폐광 직전의 탄광촌을 무대로, 그리고 다분히 흑백톤의 느낌으로 세 인물(기영, 성철, 영숙)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냈습니다. 얼핏 멜로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삼각관계의 구도가 눈에 띕니다만 이 세 인물의 관계는 결코 치정으로 읽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엮어내는 드라마는, 내일에 대한 불안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는 당시 한국 사회의 축소판으로 느껴집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악덕 기업주, 연탄공장 사장과 그에게 아부하며 굽신거리는 하수인들, 비리를 눈감아 주고 한 몫 챙기는 형사들, 그들 때문에 고통받는 노동자들, 그리고 이 영화 세 주인공들인 수배중인 기영, 자신의 생모를 버렸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증오하며 망나니로 살아가는 성철, 어쩔 수 없이 티켓을 팔고 있지만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려고 발버둥치는 영숙 등 이들은 각기 피해자로 혹은 가해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저마다 다른 고통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선가요. 영화 제목이 그들도 우리처럼인 게 다분히 박 감독의 의도로 읽혀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또다시 도피를 위해 기차에 오르는 기영의 표정은 영화 첫 도입부에 드러나는 어두운 표정과는 달리 웬지 희망을 기대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아마도 어렵고 힘든 현실 너머에는, 마치 터널을 지나면 밝은 햇살을 만나게 되듯 희망의 미래가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영, 성철, 영숙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라는,,,,

그들도 우리처럼의 개봉에 앞서 가진 언론 시사회를 마치고 박 감독은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그들도 우리처럼 아파했고, 그들도 우리처럼 즐거워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고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심혜진에게 여배우로서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기록됩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만 해도 신인급이었던 심혜진은 이듬해 프랑스 낭뜨 제3대륙영화제에서 최우수여배우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미모 뿐만 아니라 연기도 잘하는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거죠. 실제로 그 후 심혜진은 한국영화사에서 내로라하는 명 감독들의 영화에 화려하게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얀전쟁’(1992,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 감독), ‘세상 밖으로’(1994, 여균동 감독), ‘은행나무 침대’(1995, 강제규 감독), ‘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 등등.

 

박중훈 역시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보다 입체적인 배우로서의 색깔을 채색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대학생, 또는 20대 젊은이의 풋풋한 이미지를 발산해왔으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는 캐릭터의 외연을 넓히는 게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흑백톤 느낌의 화면 속에서 낡은 오토바이와 더불어 거친 반항아로서의 이미지변신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박중훈 스스로도 박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칠수와 만수그들도 우리처럼을 통해 내면 연기에 눈을 뜨는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렇듯 심혜진과 박중훈 등 두 배우가 정상급 연기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이끈 박광수 감독 역시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청룡영화상에서는 최우수작품상을, 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는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촬영현장에서 함께 울고 웃고 뒹군 모든 이들이 보람과 행복을 느꼈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가 그들도 우리처럼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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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우리처럼'의 주요 촬영지인 강원도 태백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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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은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칠수와 만수'에 이어 '그들도 우리처럼'까지 함께 작업하면서 스스로 '내면연기에 눈을 뜬 시기'라고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