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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장미빛 인생`

기사입력 [2018-02-0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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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만화책 읽느라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은 누구나 한두 번쯤 갖고 있을 겁니다. 대개는 만화방에서 만화를 빌려와 집에서 읽는 경우가 많았지만, 만화방에서 라면이며 김밥, 떡볶기 등을 먹어가면서 만화를 보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심지어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 이른바 만화방의 전성기로 불리던 시절에는 심야 만화방에서 아예 숙식까지 해결해야 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 컬러TV가 보급되고, 비디오문화가 확산되면서부터는 TV나 비디오를 시청하는 장소로도 이용됐습니다. 간혹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운동경기라도 중계될라 치면 온 동네 서민들이 모두 만화방으로 몰려들어 단체관람을 하며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지요. 만화방이 문화사랑방의 노릇을 톡톡히 했던 겁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만화방의 시설은 대체로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나무의자는 딱딱했고, 간혹 한쪽 편에 놓여진 소파에서는 스프링이 삐져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만화책이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공간인데, 조명이 너무 어두웠습니다. 만화방의 어른들은 같은 공간에서 만화책을 읽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개의치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뻑뻑 피워댔습니다. 여기에다 라면을 끓이거나 떡복기를 만드는 연탄불에서 나오는 매캐한 일산화탄소 가스와 음식 냄새까지 늘 뒤섞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만화방은 추억의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떡볶이와 오뎅을 먹어가며 읽었던 고행석이며 이현세, 허영만, 고우영, 이두호 작가의 만화들을 떠올리면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금세 과거의 시절로 돌아가게 되니까요.

 

영화 장미빛 인생’(1994, 김홍준 감독)은 바로 이 만화방을 영화의 중요한 공간으로 끌어왔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 구로공단 가리봉동 역 주변의 허름한 만화방을 이야기의 무대로 삼았지요. 이곳을 드나드는 사고를 치고 피신해 있는 깡패,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는 지식인, 또는 시국사건에 연루된 노동 운동가 등의 굴절된 삶을 통해 1980년대의 어두웠던 사회상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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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빛 인생'에는 군복무 후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최재성(사진 위에는 오른쪽, 아래에는 왼쪽)과 '우묵배미의 사랑'이후 4년만에 영화에 출연하는 최명길의 출연으로 촬영단계부터 화제를 낳았다.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와 조감독으로 장군의 아들 2,3서편제등을 작업해온 김홍준 감독의 데뷔작이었습니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김 감독은 데뷔 이전에 이미 영화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구회영이란 필명으로 명성을 날리던 영화 컬럼니스트였습니다. 당시 로드쇼라는 영화잡지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란 컬럼을 연재했는데, 이는 영화를 좀 안다고 우쭐대던 영화매니아들조차 주눅들게 하는 필독 컬럼으로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인터넷베이스가 구축되기 전, 영화에 대한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밥먹는 사람치고 이 컬럼을 읽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훗날 동명의 책으로 발간된 이후, “국내의 영화관련 서적 중에는 거의 전설과도 같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지요.

 

이같은 백그라운드를 지닌 탓에 장미빛 인생에 대한 관심 역시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영화매니아들에게는 구회영이란 컬럼니스트가 만든 영화였던 셈이니까요. 그리고 반항아적인 이미지의 청춘스타 최재성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첫 출연하는 영화라는 점과 우묵배미의 사랑’(1990, 장선우 감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최명길의 4년만의 영화출연이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았습니다.

 

장미빛 인생의 개봉 당시 영화홍보 전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입장료 1,000원의 심야 만화방, 밤참으로 라면 한 그릇, 재떨이 속에 파묻힌 꽁초,,,,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소박한 군상들의 꿈

김 감독의 연출의도가 엿보이는 메인카피였습니다. 실제로 김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상투적인 시각으로 보면 전혀 80년대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통해 80년대를 되짚어보려고 한다고 밝혔습니다. 덧붙여 그는 80년대를 이야기하면서, 공장이나 탄광이나, 농촌이나 군대가 아닌 만화방으로 가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이 영화에서 찾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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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를 치고 가리봉동 만화방으로 흘러들어온 동철 역의 최재성.

  

구로공단 가리봉동 하늘 위로 쉴 새 없이 굉음을 내며 비행기가 날아가고, 그 아래 허름한 만화방으로는 여러 가지 사연을 지닌 현실도피자들이 흘러듭니다. 만화방의 낡은 TV에서는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 사회정화를 해야 한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카메라 프레임 안에 비쳐지는 만화방의 사람들은 그런 뉴스에는 무신경한 채 만화책만 넘길 뿐입니다.

마담이라 불리는 미모의 여주인(최명길)이 운영하는 가리봉동의 만화방은 심야영업을 하기 때문에 마땅히 갈 곳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사고를 친 깡패 동철(최재성)과 수배중인 노동운동가 기영(차광수), 아르바이트로 쓴 무협지 때문에 공안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는 유진(이지형) 등도 이곳으로 숨어듭니다.

동팔은 만화와 비디오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사고 수습을 위해 애를 쓰고, 기영은 만화방 주변을 오가며 잠적생활을 이어가고, 유진 역시 하릴 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근처 다방 레지 미스오(황미선)와 사랑에 빠집니다.

미모의 마담에게 마음을 빼앗긴 동팔은 어느날, 만화방에서 단 둘만 있게 된 틈을 이용해 그녀를 겁탈합니다. 그 후 동팔은 마담의 경멸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일편단심 사랑을 키워가는데, 다만 기영에게 잘 대해주는 그녀의 태도에는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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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에 앞서 분장에 열중하고 있는 최명길.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는데, 기영은 마담의 남동생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누나가 노동운동을 하는 동생의 은신을 도와주는 것이었지요. 이 만화방에서 서로 부딪치며 충돌하는 여러 군상들, 깡패와 조직폭력배라든가 경찰과 시국사범, 취객들과 동네 불량배 등을 통해 치열하게 살았던 80년대 민중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게 이 영화의 미덕이었습니다.

 

특히 최명길의 연기는 빛을 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철(최재성)에게 겁탈 당할 때의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겁탈하려고 달려드는 동철을 거부하던 몸짓에서 체념, 그리고 이내 동철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는 그녀의 표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후 동철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 또한 무표정하지만 속깊은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게 그대로 전해졌지요.

최명길의 연기는 그해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으로 평가받았습니다만 비단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 낭뜨의 제3대륙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녀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김 감독 역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시나리오(육상효)에서도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말 장미빛 인생은 프랑스 영화비평가들이 수여하는 조르주 사둘영화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1968년 제정된 이 상은 당해 연도에 제작된 신인감독의 데뷔작을 대상으로 프랑스영화 1편과 외국영화 1편을 선정해서 시상하는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장미빛 인생의 흥행성적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8월초 한창 뜨거운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됐습니다만 3주만에 극장간판을 내려야 했으니까요. 한 편의 영화가 작품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한번 일깨워준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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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 만화방의 마담 역으로 명연기를 보여준 최명길. 그녀는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상과 프랑스 낭뜨 3대륙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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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빛 인생'에서 마담 역의 최명길(왼쪽)과 마담의 맞선남으로 특별출연한 배장수(당시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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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에서 최명길(가운데)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김홍준 감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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