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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장군의 아들`

기사입력 [2017-12-0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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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818,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는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1930년대 종로통을 호령했던 협객 김두한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장군의 아들’(임권택 감독)에 출연할 신인배우들을 선발하는 오디션이 열렸던 겁니다. 특히 이 신인배우 공모에 유난히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 이유는 장군의 아들의 주요 배역들을 20대로 한정한다는 조건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진 김두한 소재의 영화나 TV드라마에서는 이름난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김두한 등 주요 인물들의 나이가 30대 이상으로 짜여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장군의 아들은 사뭇 달랐던 거지요. 아침부터 시작된 신인배우 선발 오디션은 오후 7시 무렵까지 계속 됐습니다. 배우 지원자들의 출신들도 다양했습니다. 현역 배우나 TV탤런트들도 있었고, 연기를 전공하는 대학생들, 또는 방송이 연극무대에서 연기해본 경험이 있는 단역배우들, 그런가하면 버젓이 직장생활을 하는 회사원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있었습니다.

이날 오디션에 참여한 수백명의 연기와 재능 등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은 장군의 아들의 제작사인 태흥영화()의 이태원 대표를 비롯해서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차정남 조명감독, 배창호 감독, 곽지균 감독, 이명세 감독, 안성기, 강수연 등이었습니다. 당시 태흥영화사에서 제작하거나 기획 중인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이었지요.

 

이날 오디션 현장은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 화제 뉴스로 크게 보도됐습니다. 이전까지 이처럼 공개적인 신인배우 공모가 별로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처럼 수백명의 지원자들이 몰려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지원자들이 펼치는 그들의 특기나 재능들 또한 심사위원들의 일반적인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당초 제작사와 임권택 감독은 김두한을 비롯해 일본 야쿠자 두목 하야시, 종로통의 주먹패 신마적과 쌍칼 등 10여명 정도를 선발할 계획이었으나 지원자들의 엄청난 열정과 재능에 감동한 나머지 무려 44명의 지원자를 선발했습니다.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 뿐 아니라 조연, 단역들까지 거의 모든 배역을 신인들로 기용하는 초강수를 둔 겁니다.

이날 신인배우 공모에서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 김두한 역에는 박상민이 뽑혔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만 거의 대부분의 심사위원들도 박상민을 젊은 김두한으로 결정하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당시 박상민은 서울예대 2학년생, 스무살이었습니다. 그동안 김두한을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새파란 김두한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이날 오디션에서 박상민은 다소 수줍은 모습으로 연극 품바의 한 대목을 실연해보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도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얼핏 그다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만한 임팩트는 없는 듯 보였지요.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박상민의 눈빛을 찬찬히 뜯어봤습니다. 옆자리의 동료 심사위원들에게도 저 눔 눈빛이 참 좋네라며 유심히 살펴봐줄 것을 당부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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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은 유난히 액션장면이 많았다. 김두한 역의 박상민을 비롯해 배우들 모두 기본적으로 무술훈련을 받고 촬영에 임했다.

  

이날 선발된 박상민을 비롯한 하야시 역의 신현준, 쌍칼 역의 김승우, 김동해 역의 이일재, 신마적 역의 김형일, 유일한 여자배역인 화자 역의 방은희, 우미관 사장 김기환 역의 민응식, 종로깡패 왕마귀 역의 김해곤 등 44명의 배우들은 곧바로 신인 배우 를 벗어내는 강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당시엔 전혀 눈에 띄이지 않았지만, 이때 선발된 신인배우 중에는 훗날 '정상급 배우'가 된 황정민도 있었습니다. 황정민은 영화 속의 술집 낙원회관의 지배인으로 잠깐 출연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액션장면이 많은 영화여서 정두홍 무술감독으로부터 기본적인 무술훈련을 받았고,  이명세 감독으로부터는 연기 훈련을 받았습니다.  1989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혹독한 훈련을 끝낸 뒤, 19901월부터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당시를 재현하는 종로 거리와 우미관(훗날의 단성사) 등의 세트를 지어 촬영했습니다.경기도 벽제에 적지 않은 규모의 세트장을 지었습니다. 전차선로를 깔고, 전차도 등장했습니다이 와중에 배우들은 30도 가까운 초여름 날씨에도 1월부터 시작된 촬영의 연결장면 때문에 겨울용 의상을 계속 입어야 했습니다.

 

3, 4월쯤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촬영은 연기 경험이 별로 없는 신인들을 기용한 탓에 의외로 길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사고(?)들도 다소 영향을 끼쳤습니다.

 

촬영 막바지 무렵이었습니다. 주인공 박상민이 어느날 눈두덩이가 붓고 입술이 터진 모습으로 촬영장에 나타났습니다. 지난 밤에 촬영을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거리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그만 젊은 혈기에 주먹다짐이 있었던 겁니다. 가뜩이나 촬영이 길어져서 여름방학 개봉에 맞추느라 임 감독 등 스태프들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는데, 주인공 김두한의 얼굴이 그 지경이 됐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었겠습니까. 박상민은 고개도 못들고 있고, 모든 스태프들은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습니다. 긴급회의 끝에 임 감독이 연륜에서 나오는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김두한이 인천 쪽을 둘러보다가 동네 깡패들에게 느닷없이 기습을 당해 얻어맞는 장면을 하나 추가한 겁니다. 그래서 이 장면 이후부터 김두한의 얼굴은 상처난 채로 찍혔습니다. 나중에 촬영현장을 취재나온 기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어쩌면 진짜 맞은 것처럼 분장을 했네!”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또 영화 속의 김두한에게는 늘 3~4명의 부하들이 따라다니는데, 어느날 그 부하 중 한 명이 머리를 아주 짧게 깎고 촬영장에 나타난 사건도 있었습니다. 연결 장면 촬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수였지요. 이전 장면에서의 헤어스타일과 다르면 다음 연결 장면을 찍을 수 없으니까요.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영빈 감독은 부하 역을 맡은 배우들을 모아놓고 크게 야단쳤습니다만, 장면 연결이 튀는걸 어쩌지 못해 쩔쩔 맸습니다. 이번에는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감독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김두한보다 두세 걸음 뒤쪽으로 서게 한 것이죠. 말하자면 그 배우를 포커스아웃처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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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의 안타고니스트(주적이란 뜻으로 주인공의 상대역)로 등장하는 일본 야쿠쟈 하야시(신현준, 왼쪽에서 두번째)와 그의 심복 김동해(이일재, 왼쪽).

  

이런 과정을 거쳐 장군의 아들199069일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개봉됐습니다. 이 무렵 마유미’(신상옥 감독)남부군이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됐습니다. 모처럼 한국영화의 대작들이 한꺼번에 개봉된 겁니다. 사실 당시의 여건으로 보면 세계적인 이슈를 몰고 다녔던 고()신상옥 감독의 마유미나 안성기 최진실 주연의 남부군이 훨씬 더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장군의 아들은 출연 배우들이 신인이었고, 임권택 감독 또한 씨받이’(1986) ‘아다다’(1987)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등의 영화로 해외영화제 수상을 잇달아 이끌어냈지만 흥행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얻지 못하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69일 토요일 아침, 단성사의 매표구 앞에는 관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습니다. 극장 앞에서 종로 3가 지하철 역 출구를 돌아서 종묘까지 늘어선 줄의 끝이 안보일 정도였습니다. 매회 매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습니다만 당시에는 흥행영화의 극장 앞에는 암표상들이 늘 서성거리며 웃돈 얹어 표를 팔았습니다. ‘장군의 아들이 개봉된 6월부터 여름방학 시즌을 지나 추석 대목과 12월 종영될 때까지 서울 시내의 모든 암표상들은 종로3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군의 아들은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전까지 겨울여자’(1978, 김호선 감독)58만명이 한국영화 흥행 최고기록이었는데, ‘장군의 아들68만명 동원 기록을 세운 겁니다.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 받는 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흥행감독으로서도 우뚝 서게 됐지요.

 

이 컬럼의 특징인 비하인드 스토리, 처음 임 감독은 장군의 아들을 찍자는 영화사측의 제안에 화를 벌컥 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60년대에 저급한 오락액션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또 이런 영화를 찍자니까 속이 상했지요. 바쁘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만다라’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등을 찍어온 강행군을 잠시 쉬어가자는 설득에 그럽시다 했지요

 

장군의 아들은 이렇게 해서 해방 이후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로 탄생한 겁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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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은 한국형 액션영화의 태동을 알린 영화로도 기록된다. 정두홍 무술감독 등 무술 담당 스턴트맨들의 활약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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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막바지 무렵,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나타나 임 감독 등 스태프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던 김두한 역의 박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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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의 메인 포스터 컨셉을 잡기 위한 촬영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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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아들' 신인배우 공모에 선발되던 당시 박상민은 대학2녀생, 스무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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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쿠쟈 두목 하야시 역의 신현준 역시 대학(연세대 체육과) 3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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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은 '눈빛이 좋다'며 박상민을 김두한 역으로 낙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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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쿠쟈 두목 하야시로 분장한 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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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새롭게 쓰던 날, 상영극장인 단성사 앞에서 박상민(가운데) 등 '장군의 아들'의 영화 관계자들이 '한국영화 흥행최고기록' 축하연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