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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경마장 가는길`

기사입력 [2017-10-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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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경마장 가는 길’(1991, 장선우 감독)은 여러 가지로 흥미있는 기록을 남긴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경마장이나 경마장에서 뛰는 말 한 마리 등장하지 않습니다. 제목처럼 경마장 가는 길에서 영화를 찍지도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이 영화는, 또는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하일지 작가의 동명 소설도 경마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영화에 앞서 하일지 작가의 경마장 가는 길1990년 출간되자마자 한국 문단에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제목으로 사용된 경마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모호한 상징성을 두고 참으로 많은 해석과 비평이 쏟아졌습니다. “실존하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억압 속에서 상상되는 비상구라거나 한국 소설에 새로운 현대성의 지평을 여는 시금석이라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영화로 옮겨진 뒤에도 원작소설에서 표현된 에로스의 세계, 특히 섹스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녀 주인공의 직설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대사들은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 138분 내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유부남 R(문성근)이 프랑스 유학시절 동거하던 J(강수연)에게 섹스하자며 쫓아다니고, J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섹스 하자R은 시종일관 J에게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J는 또 왜 지금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영화 초반, R이 온천에 가자고 했다가 온천에 가서 뭘 하느냐고 되묻는 J에게 매우 진지하게 대답합니다 뭘 하긴 뭘해? 우선 온천물에 목욕을 하고, 그리고 네 젖가슴에 내 얼굴을 부벼대고, 그리고 네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고, 그리고 네 사타구니에 내 사타구니를 밀착시키고, 그리고 우리가 늘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몸을 섞고,,,”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모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본능과 감정에만 충실한 단세포적 인물들처럼 보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박사님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기껏 섹스하러 가자거나 안된다면서 티격태격 실랑이나 벌이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우리 사회의 속물근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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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돌아온 후에도  J(강수연)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하는 R(문성근,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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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문성근)의 집요한 섹스 요구에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거부하는 J(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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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닝타임 138분 내내 집요하게 J(강수연)을 쫓아다니며 '섹스'를 요구하는 R역의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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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문성근)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다니는 J역의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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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과 재력을 겸비한 남자와의 결혼을 준비하는 J(강수연)의 태도에 절망하는 R(문성근).

결국 자신의 평론 표절을 돈으로 보상할 것을 요구한다.   

 

주인공 R은 문학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중, 역시 같은 목적으로 프랑스 유학중인 미모의 J를 만나 동거하기에 이릅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귀국한 뒤에도 R은 여전히 J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합니다. J를 만나면 R은 언제나 섹스를 원합니다. 하지만 J는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라면서 거부합니다. RJ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아내(김보연)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아내와의 이혼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은 채 시간강사 자리를 얻게 된 R은 대구와 서울을 오가면서 변함없이 J를 쫓아다닙니다. 다분히 분열적으로 J와의 섹스에 집착하는 R, 하지만 J는 학벌 좋고 재력을 겸비한 남자와의 결혼을 준비합니다. 그런 J의 태도에 절망하면서도 R은 더욱 J에게 집착합니다.

그러던 중 R, J가 자신의 평론을 베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된 사실을 알고 분노합니다. R은 이를 핑계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J를 협박합니다. 그러나 J는 꿈쩍도 안합니다. 결국 R은 자신의 평론 표절을 돈으로 보상할 것을 요구하고, J는 미련없이 돈을 건넵니다. 돈을 받아든 R은 착잡한 마음으로 짐을 싸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하고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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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의 평론을 베껴서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된 J(강수연)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는 R의 협박에도 개의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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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평론 표절을 돈으로 보상할 것을 요구한 R(문성근)은 J(강수연)로부터 돈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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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감독(왼쪽)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J역의 강수연(오른쪽)과 찍을 장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RJ의 섹스를 둘러싼 갈등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점잖게 표현해서 갈등이지, ‘섹스타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R이 아내와의 이혼 문제로 갈등을 겪는다든지, J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준비한다든지 하는 곁가지의 이야기들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영화에서는 내내 RJ하자, 말자타령이 이어집니다. 당시 매스컴 등에서는 바로 이러한 점에 포커스를 맞춰 예술을 빙자한 포르노라며 가십으로 다루기도 했고, “포르노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입으로만 한다고 비꼬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영화를 보고나오는 관객들 중에는 남자는 계속 하자고만 하고, 여자는 안하면 안되느냐고만 하고,,, 남녀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말장난만 하는 것 같아 짜증났다고 볼멘 소리를 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비평가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의 모럴 해저드를 담론으로 내세운 실험적인 영화라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형식의 영화가 출현한 데 주목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장선우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었습니다. 문학박사인 남녀 주인공 RJ가 섹스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를, 사실은 지극히 본능적이며 세속적인 감정일 뿐인데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허위와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한 겁니다. 지식인이랍시고 폼을 잡아본 들, 그들이 섹스를 이성적이거나 지성적으로 하느냐는 풍자입니다. 물론 배운 게 많아서 학문적인 지식을 동원하거나 논리적인 언어를 유희처럼 남발하지만, 심지어는 마치 모국어인 양 외국어를 내뱉기도 하지만 결론은 한번 하자!”라는 겁니다. 오죽하면 섹스를 계속 거부하는 J에게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냐?”고까지 하겠습니까. 이 대사는 한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이런 섹스타령에 불쑥 튀어나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렇듯 얼핏 시시껍절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장 감독은 치밀하게 계산하여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남녀 주인공을 맡은 문성근과 강수연에게 연기하는 것 같지 않게, 정말 일상적인 모습을 연기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배우로 군림하던 월드스타 강수연이야 두말 할 필요가 없었고, 문성근 역시 진지한 연극무대 경력을 바탕으로 장 감독의 연출의도에 맞춰 분열적 섹스집착증을 잘 표출해냈습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가진 시사회에서 문성근은 끈적끈적할 정도로 관객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인데, 그렇게 보였나요? 그렇다면 성공입니다라고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촬영기간에도, 또 개봉 후에도 여러 가지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처음 장 감독이 영화 만들겠다며 원작소설을 영화제작사(태흥영화사)에 건넸을 때, 영화사 내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영화로 만들기에는 원작의 재미가 떨어진다며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장 감독의 전작 우묵배미의 사랑’(1990)을 감명깊게 본 이태원 사장은 원작과 관계없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장 감독을 믿는다며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장 역시 원작 소설은 너무 재미없어서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렸다고 합니다. ‘경마장 가는 길이 개봉 후 서울에서만 19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자, 극장가에서는 이 사장의 흥행감각을 모두 부러워했습니다.

 

PS. 홍상수 감독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경마장 가는 길을 보고, 한국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일상을 다루는, 특히 찌질한 남성의 속물근성을 집요하리만치 파고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경마장 가는 길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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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의 촬영현장은 늘 밝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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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일상적인 모습으로 연기해 줄 것'을 배우들에게 당부한 장선우 감독(왼쪽).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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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의 제작발표회 현장. 왼쪽부터 문성근(R), 강수연(J), 그리고 김보연(R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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