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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기사입력 [2018-04-1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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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면서 온갖 추측과 루머로 술렁였던 19947월은 그 어느 여름보다 무더웠습니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무더웠다는 그해 7월의 최고 평균기록이 38.4도였으니까요.

이렇게 무더운 한 여름, 그것도 가장 한 시즌인 730일에 김일성 주석 사망소식을 뒤로 하고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정지영 감독)가 개봉됐습니다. 당시 상영극장이었던 대한극장 간판에는 우린 그때 마릴린 몬로의 치맛 속이 궁금했다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씌어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습한 한반도의 여름날 더위와 마릴린 몬로의 치맛속에서는 웬지 모를 에로티시즘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당시의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에게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온갖 정보들이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니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관능적인 매력은 청소년들의 혼을 쏙 뻬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때문에 미국 영화 배우들의 사진과 동향이 가득 담긴 일본판 영화잡지 스크린은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인기 도서였습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영화의 메인 카피에 마릴린 몬로의 치맛속이란 표현이 등장했겠습니까.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이렇듯 영화에 흠뻑 빠져들었던 청소년기에 대한 향수를 끄집어내면서 지나치리만치 할리우드 영화에 도취해 영화와 현실마저 구분하지 못하게 된 영화광의 안타까운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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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최민수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광적으로 집착하여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임병석 역할을 맡았다.

 

학교 수업 중 잠깐 쉬는 10분 동안 수백 명에 이르는 배우들의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소년 임병석(홍경인)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에 관한 한 백과사전과도 같았습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이름이며 특징까지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때문에 교실의 많은 학생들은 늘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할리우드의 소식들에 흠뻑 빠집니다. 또 다른 주인공 윤명길(김정현)도 영화제목과 대사들을 줄줄 외우고, 가보처럼 할리우드 영화 팜플렛을 모으는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병석으로 인해 영화에 눈을 뜨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병석과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질시에도 사로잡힙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임 황야의 7을 결성한 병석과 명길은 기상천외한 영화순례에도 나섭니다. 그러던 중 명길은 극장에서 만난 현숙(신혜수)과 사귀게 됩니다. 그런데 현숙이 영화지식에 해박한 병석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되자, 명길은 병석에게 화를 내고 절교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함께 보러 갔던 친구가 단속반을 피해 2층에서 뛰어내리다가 추락사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둘은 다시 화해합니다. 그렇지만 명길은 병석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대학생활과 군 복무를 마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충무로 영화계에 뛰어들어 조감독 생활을 하던 명길(성인 역할은 독고영재)은 병석(성인 역할은 최민수)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를 수소문해 찾아갑니다. 하지만 병석은 예전의 그 멋진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술집 여자에게 얹혀 살면서 허황된 할리우드 영화 대사나 읊고 있는 룸펜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명길은 병석에 대한 연민을 안은 채 그와 헤어집니다.

그러던 어느날, 명길에게 병석이 찾아옵니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인데, 명길에게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석이 건네준 시나리오를 읽은 명길은 영화의 모든 조건들을 다 갖췄음에 흥분하여 영화사에 제작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사의 영화화 결정 소식을 듣고 명길은 병석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명길은 병석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둡니다. 관객들의 찬사는 물론 평단의 호평까지 받으며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비평가로부터 명길의 영화가 온갖 할리우드 영화들의 구성과 대사 등을 짜깁기해 놓은 것이라는 폭로성 비평을 듣게 됩니다. 명길 역시 자신의 영화를 꼼꼼이 다시 들여다보고 나서 그 비평이 옳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영화를 다시 살펴보던 중, 행방불명된 줄 알았던 명길이 영화 곳곳에서 엑스트라로 모습을 비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노한 명길은 수소문 끝에 병석을 찾아내어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런데 명길의 대답이 이렇게 돌아옵니다.

나도 내 창작 시나리오인 줄 알았어

좋아했던 영화에 몰입되어 영화처럼 인생을 살았던 병석으로서는 자신의 삶과 영화가 구별되지 않았던 겁니다. 표절이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의 창작품인 줄 알았던 병석의 비극적인 삶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과는 달리 교통사고사로 마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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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통해 최민수(사진 위)와 독고영재(사진 아래 왼쪽)은 처음으로 대등한 주연으로 연기 대결을 펼쳤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실제로 헐리우드 키드의 삶을 살았던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안정효의 자전적인 원작을 토대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미 안정효 작가와 정지영 감독은 하얀전쟁을 통해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았던 터라 영화화 작업 또한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영화의 개봉시점인 1994년에는 유난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 외에도 5월에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에 취임하는 등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해로 기억됩니다. 몇 해 전 장안에 화제를 뿌렸던 TV시리즈 응답하라 1994’의 제작 토대가 되었을 정도니까요.

 

그래선가요. 영화 속에서는 정지영 감독이 선봉장으로 나섰던 1990년대 초반의 스크린쿼터 사수 궐기대회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화계의 이런저런 풍경들에도 영화인들이 카메오로 출연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서정민 촬영감독과 신병하 조명감독, 그리고 각본으로 이름을 올렸던 심승보 조감독 등도 모두 난생 처음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 속의 두 주인공 임병석과 윤명길 역을 맡았던 최민수와 독고영재의 연기 케미는 특히 관객들과 비평가들로부터 두루 호평을 받으며 인구에 회자됐습니다. 최민수와 독고영재는 이른바 ‘2세 배우‘(최무룡과 독고성의 아들)라는 공통점으로 이미 여러차례 같은 영화에 출연해서 연기력을 과시해왔습니다. 이들처럼 ’2세 배우로 활동해온 이들 중에는 이덕화(이예춘의 아들), 전영록(황해의 아들), 허준호(허장강의 아들), 박준규(박노식의 아들)등도 있었습니다만 이 무렵에는 단연 최민수가 주연급 배우로 활약했습니다. 독고영재는 조연이거나 단역이었구요.

 

말하자면 독고영재로서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처음으로 최민수와 대등한 위치의 주연으로 올라선 작품인 셈입니다. 나이는 독고영재가 최민수보다 열 살이나 많습니다만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는 친구로 나왔던 거지요. 그만큼 최민수는 나이에 비해 노숙한 편이고, 반대로 독고영재는 동안이었기에 가능했던 조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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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에서 조명팀의 조명기를 대신 들어주는 최민수.

 

그 외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독고영재가 최민수보다 나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남부군’(1990, 정지영 감독)에서도 독고영재는 빨치산 지도부원, 최민수는 인텔리 시인 김영 역할을 연기했지요. 그리고 한때 국민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MBC TV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도 고현정을 사이에 두고 최민수가 학원강사로, 독고영재는 고현정의 마음을 흔드는 중후한 매력의 학원 원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주연은 최민수였고, 독고영재는 조연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당당히 주연을 꿰차고 최민수와 대등한 연기를 펼쳤던 독고영재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개봉에 앞선 시사회에서 영화에 미쳐 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치 내 자신의 청소년기를 보는 것 같아서, 정말로 열심히 찍었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두 사람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개봉 다음 해에 테러리스트’(1995, 김영빈 감독)를 다시 함께 찍었습니다만 다시 예전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최민수는 주연, 독고영재는 조연으로 말입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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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영재(왼쪽), 최민수(가운데), 정지영 감독(오른쪽)은 '남부군'에서 함께 작업한 이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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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에 앞서 분장 중인 최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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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촬영을 맡았던 신옥현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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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영화감독 윤명길 역의 독고영재(가운데)가 크레인에 올라 연기 리허설을 준비하고, 그 옆에서 정지영 감독(오른쪽 모자)이 촬영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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