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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황금돼지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사입력 [2018-12-31 15:44]

2019년 기해년은 60년만의 황금돼지해로 화제가 되고 있다. 복과 재물을 상징하는 돼지에 황금이 플러스돼 그 어느해보다 길운으로 여겨지고 있다.

돼지해중 황금돼지해는 기해년이 유일하다. 39년 이후 기해년은 1959년까지 모두 33번 있었다. 특이한 것은 전쟁이 많았던 과거 역사속에서 황금돼지해에는 이렇다할 전쟁 기록이 없어 평화시대로 기억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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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옥사. 구한말 천주교 박해시 천주교인들이 대거 투옥됐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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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호야나무. 수령 300여년된 이 나무는 구한말 천주교인들을 나무에 매다는 등 고문했던 나무로 유명하다.


1959년 태풍 ‘사라’로 사상 최대 피해 발생 

6.25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던 1959년. 어려움속에서도 60년만의 황금돼지해로 기대에 부푼 한해를 맞았고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풍성한 한가위를 맞은 한반도에 뜻하지 않은 큰 재난이 발생했다. 추석명절이 시작된 1959년 9월 12일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강타해 사망 840명, 부상 2533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안겼다.

역대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루사(2002)는 재산피해 규모가 5조원 이상이었지만 인명피해는 246명이었다. 사라는 풍속과 강수량이 역대 태풍중 10위에 불과했지만 당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력인데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온가족이 모인 가운데 산사태와 홍수에 휩쓸리면서 큰 피해를 냈다.


황금돼지해와 언론은 상극? 

1959년은 자유당 정권시절로 ‘댕전뉴스’같은 친정부적인 보도가 주류를 이루던 언론통제 시절이었다. 이같은 가운데 당시 경향신문이 이승만 회견기사 등 정부에 비판적인 글로 인해 폐간됐다가 1년뒤에 복간됐다.

공교롭게도 60년전 황금돼지해인 189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로 인해 창간 4년 만에 폐간됐다. 최근 정부가 ‘가짜뉴스’를 근절시킨다는 명분아래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어 황금돼지해의 징크스가 재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격변기 구한말에도 황금돼지해는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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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러시아아공사관으로 피신할때 이용했던 덕수궁 뒤쪽 돌담길이  '고종의 길'로 명명돼 일반에 개방됐다.


19세기 말은 서구열강의 세력다툼속에 조선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따라 강화도 조약(1876년),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동학혁명․일본군의 경복궁 급습 사건(1894년), 단발령(1895), 제주민란(1901년) 등 많은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같은 격변기 상황에서도 황금돼지해인 1899년은무난하게 지나갔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제물포∼노량진) 철도가 개통되고 서울∼인천간 시외전화가 개통되는 등 근대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기해박해로 천주교도 대거 희생 

1839년 기해년에는 수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는 ‘기해박해’로 온나라가 뒤숭숭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는 4번의 큰 박해를 겪는다. 이중 하나인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다. 이때 3명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해 119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거나 투옥됐다. 당시 10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된 곳에 조성된 서울 용산 당고개성당은 천주교 성지로 돼 있다.

기해사옥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겉으로는 천주교 박해사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세도가문이자 천주교에 관용적이었던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이후 권력은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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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때 처형된 천구교도를 봉헌한 당고개순교성지(출처-당고개성당)


상복 몇 년 입느냐 등 왕실내부 문제로 갈등 

1659년 기해년은 조선 제17대왕 효종이 승하한 해다. 종기가 난 부위에 침을 맞은 후 많은 피를 흘린 실혈사((失血死)로 인해 41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효종 승하 후 조정은 자의대비(인조의 둘째 왕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극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에 휘말렸다. 장남 소현세자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둘째아들인 만큼 1년상을 주장하는 서인과, 왕이 되었음으로 첫째아들로 대우해 3년상을 해야한다는 남인이 대치한 일종의 말싸움이었다. 결국 효종의 뒤를 이은 헌종이 서인 편을 들어 1년상으로 마무리됐다.


1479년(성종 10년) 기해년은 조선 왕실 내부 갈등이 극심한 해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중전 윤씨가 성종과 세명의 대비, 후궁들과 갈등을 일으켜 집안싸움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중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 이어 사약을 받음으로써 훗날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7년 임진왜란 끝나고 평화원년 맞아

1599년 기해년은 왜구가 조선을 유린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를 맞은 원년이어서 서민들이 황금돼지해의 축복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을 거쳐 7년 동안 전국을 황폐화시켰는데, 공료롭게도 1599년 황금돼지해 직전인 1598년에 끝났다.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 사망하자 왜군이 조선에서 철수함에 따른 것이다. 전쟁도 황금돼지해를 비켜간 것이란 말이 나올만하다.


황금돼지해에는 이렇다할 큰 전쟁이 없는 가운데 다소 규모가 있는 전쟁이 발생한 황금돼지해를 꼽자면 1419년과 1359년이다.

1419년(세종 1년) 기해년은 조선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타국을 침범해 전쟁을 일으킨 해다.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던 조선은 1419년 6월 20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로 하여금 227척의 함선과 1만7000여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게 했다. 이종무는 대마도 앞바다에 함선을 정박하고 2주간 전투를 벌였고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귀환했다.

1359년 고려 공민왕때는 원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물러나있던 4만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했으나 곧 토벌됐다.


26세 젊은 무인 경대승, 정중부 꺾고 정권장악 

1179년 기해년에는 26세의 젊은 무인이 경대승이 기해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의 대부격인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탈취해 ‘도방정치’를 시작했다. 경대승은 신변 보호를 위해 사병 100여명의 뽑아 도방(都房)이라는 사병집단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정치를 했고 이를 도방정치라 불렀다. 혈기있게 개혁정치를 펼치던 경대승은 1183년 7월 30세의 이른 나이로 병사해 도방정치의 막을 내렸다.


백두산 폭발

휴화산인 백두산이 939년 기해년에 대폭발을 일으켰다. 전문가들은 당시 분출된 화산재가 한반도 전체를 뒤덮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후 백두산은 1925년까지 30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화산폭발을 일으켰다.

혹자는 만주대륙에 위치한 발해가 갑자기 멸망한 것을 백두산 폭발과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발해는 926년에 멸망했기에 백두산 폭발과는 상관이 없다.


처용, 신라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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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출처-문화재청)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신라 향가인 처용가를 지은 처용이 신라에 나타난 해가 879년 기해년이다.

삼국유사에는 동해의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으며,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가 정사를 도왔고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했다. 처용은 결혼을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받았다.

신라때는 해상무역이 활발한 시기였다. 표현상 많은 과장이 되어있지만 처용은 배를 타고 신라로 온 중동이나 페르시아쪽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김순근 전문기자/chimak611@naver.com)